03 Mar, 2005

안도현 - 눈 그친 산길을 걸으며

머시라고 조회 수 7421 추천 수 0 목록
□□□□□□□□□□□□□□□□□□□□□□□□□□□□□□□□□□□□□□

눈 그친 산길을 걸으며

눈 그친 산길을 걸으며
나는 경배하련다

토끼가 버리고 간 토끼 발자국을
상수리나무가 손을 놓아버린 상수리 열매를
되새떼가 알알이 뿌려놓고 간 되새떼 소리를

이 길을 맨 처음 걸어갔을 인간의 이름이
나보다는 깨끗하였을 것이라 생각하고
소나무 가지 위에 떨어지지 않도록 흰 눈을 얹어두련다

산길은, 걸어갈수록 좁아지지만
또한 깊어지는 것

내가 산길을 걷는 것은
인간의 마을에서 쫓겨났기 때문이 아니라
인간의 마을로 결국은 돌아가기 위해서다

저 팽팽한 하늘이 이 산의 능선을 꿈틀거리게 하듯이
겨울바람이 내 귓볼을 빨갛게 달구어
나는 외롭지도 슬프지도 않다
나뭇잎 하나 몸에 달지 않아도 춥지가 않다

눈 그친 지구 위에
산길이 나 있다
나는 산길을 걸어가련다

                                                  - 안도현 '그리운 여우' 중에서
□□□□□□□□□□□□□□□□□□□□□□□□□□□□□□□□□□□□□□

나의 산행은 결국
인간의 마을로 돌아가기 위한 것

걸을수록 좁아지지만, 또한 깊어지는
나는 산길에 서 있다
나뭇잎 하나 몸에 달지 않고.

스펀지처럼 적극적으로 흡수하리라
모두에게 경배하는 마음으로

힘내자, 아자!

List of Articles
번호 sort
90 고정희 - 상한 영혼을 위하여 [3] 보시리 2005-02-19 19970
89 고정희 - 사랑법 첫째.. [3] 보시리 2005-02-21 6861
88 양애경 - 버스를 타고 돌아오며 보시리 2005-02-22 6515
87 도종환 - 폐허 이후 머시라고 2005-02-23 10618
86 남유정 - 마음도 풍경이라면 보시리 2005-02-27 6453
» 안도현 - 눈 그친 산길을 걸으며 [1] 머시라고 2005-03-03 7421
84 이정하 - 그런 날이 있었습니다 [1] 머시라고 2005-03-08 7293
83 안도현 - 겨울 강가에서 [1] 머시라고 2005-03-24 7066
82 최옥 - 그대에게 닿는 법 보시리 2005-04-12 6220
81 황지우 - 너를 기다리는 동안 [12] 보시리 2005-04-21 59721
80 백석 - 나 취했노라 file [1] 머시라고 2005-04-26 14838
79 류시화 - 패랭이 꽃 [4] 보시리 2005-05-08 15275
78 백석 - 멧새 소리 file 머시라고 2005-05-09 13705
77 도종환 - 우기 보시리 2005-05-09 25166
76 안도현 - 제비꽃에 대하여 [1] 보시리 2005-05-12 7075
75 박노해 - 굽이 돌아가는 길 보시리 2005-05-14 18893
74 류시화 - 나비 [2] 보시리 2005-05-20 8901
73 박우복 - 들꽃 편지 file 보시리 2005-06-10 16017
72 나희덕 - 오 분간 머시라고 2005-06-18 12192
71 김옥림 - 나도 누군가에게 소중한 만남이고 싶다 [4] 머시라고 2005-06-23 27183
외롭지 않으면 길을 떠나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