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5 Mar, 2006

나희덕 - 밥 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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밥 생각

밥 주는 걸 잊으면
그 자리에 서곤 하던 시계가 있었지
긴 다리 짧은 다리 다 내려놓고 쉬다가
밥을 주면 째각째각 살아나던 시계,
그는 늘 주어진 시간만큼 충실했지
내가 그를 잊고 있는 동안에도
시간은 흘러갔지만
억지로 붙잡아두거나 따라가려는 마음 없이
그냥 밥 생각이나 하면서 기다리는 거야
요즘 내가 그래
누가 내게 밥 주는 걸 잊었나봐
깜깜해 그야말로 停電이야
모든 것과의 싸움에서 停戰이야
태엽처럼 감아놓은 고무줄을 누가 놓아버렸나봐
시간은 흘러가지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아
냉장고의 감자에선 싹이 나지 않고
고드름이 녹지 않고 시계바늘처럼 매달려 있어
째각째각 살아있다는 소리 들리지 않아
반달이 보름달이 되고 다시 반달이 되는 것을 보지만
멈추어버린 나는 항상 보름달처럼 둥글지
그러니 어디에 부딪쳐도 아프지 않지 부서지지 않지
내 밥은 내가 못 주니까
보름이어도 나는 빛을 볼 수 없어
깜깜해 그냥 밥 생각이나 하고 있어
가끔은 내가 밥을 주지 않아 서 있을 누군가를 생각하지
밥을 주지 않아도 잘 가는 시계가 많지만
우리가 이렇게 서버린 건 순전히 밥 생각 때문이야
밥을 준다는 것은 나를 잊지 않았다는 뜻이니까
그가 감아준 태엽마다 새로운 시간을 감고 싶으니까
그 때까진 停電이야 停戰이라구, 이 구식 시계야

   나희덕, 『그곳이 멀지않다』, 문학동네(2004), 108~109 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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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웃는게 웃는게 아니라는 유행가 가사처럼
사는게 사는것 같지 않은 나날이다.
어제는 중요한 약속인 주간보고도 빠져버렸다. 미쳤다.
달콤자극하던 밥 맛도 감각의 범주를 벗어난 것 같다.
흐리멍텅한 하늘에 눌리며 뉘엿뉘엿 끼니를 때우고 돌어와 앉았다.
그동안 어떻게 살아온 거지?
책장에서 시집 한권 꺼내 들었는데 이 시가 열렸다.
이런데 내가 시를 좋아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네가 나에게 이러한데
내가 어찌 그대를 사랑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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