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 Oct, 2004

정호승 - 나뭇잎을 닦다

머시라고 조회 수 6489 추천 수 0 목록
□□□□□□□□□□□□□□□□□□□□□□□□□□□□□□□□□□□□□□

나뭇잎을 닦다

저 소나기가 나뭇잎을 닦아주고 가는 것을 보라
저 가랑비가 나뭇잎을 닦아주고 가는 것을 보라
저 봄비가 나뭇잎을 닦아주고 기뻐하는 것을 보라
기뻐하며 집으로 돌아가 고이고이 잠드는 것을 보라
우리가 나뭇잎에 앉은 먼지를 닦는 일은
우리 스스로 나뭇잎이 되는 일이다
우리 스스로 푸른 하늘이 되는 일이다
나뭇잎에 앉은 먼지 한번 닦아주지 못하고 사람이 죽는다면
사람은 그 얼마나 쓸쓸한 것이냐

□□□□□□□□□□□□□□□□□□□□□□□□□□□□□□□□□□□□□□

이제는 낙엽이 되어버린 이를 책 속에 끼워두지 못하고 죽는다면....

가을이다.
단풍이나 은행 잎은 제 강인함으로
길바닥에 떨어진 뒤라도 제 모양을 잃지 않는데,
저 나뭇잎은 가지에서 쪼그라들며 시들거리고 있다.
나 같으면 진저리치며 떨어져 버리고 말 것을
따뜻한 계절, 가지에게 자신의 빗깔을 뽐내던 저 잎은
무슨 미련으로 저런 수모를 비참하게 견뎌낸단 말인가.

가을은 왜
가지에게서 잎을 빼앗아 가는가..
겨울이 오기 전에 잎을 죽이는 살생을 자행하는가..

가을은 왜
그 아름답고 찬란한 하늘로 내 눈을 유혹해 놓고
땅 위에서는 나뭇잎을 죽여가는 것인가..

나뭇잎 고통받고 죽어가는데  
가을이 아름답다 했는가

나뭇잎에 앉은 먼지 한번 닦아주지 못하고 죽는다면..

profile

보시리

January 24, 2005

머시라고 시인..의 글을 일기에 베꼈어요~..^^*
이런 시를 쓰셨을 때..그 마음에 하얀 수건을 대면..무슨 색이..떠올랐을까..궁금.
요즘은 쥔장님의 글을 못 읽어서 많이 서운 해요..
어서~ 물기 많은 feel을 회복 하소서~^^~*
List of Articles
번호 sort
70 안도현 - 그대에게 가는 길 머시라고 2005-12-24 9025
69 프로스트 - 가지 않은 길 [1] 머시라고 2003-04-02 9415
68 류시화 - 소금 인형 [3] 보시리 2005-01-05 9435
67 신경림 - 갈대 머시라고 2003-04-02 9438
66 정현종 - 섬 [2] 머시라고 2003-04-02 9514
65 이문재 - 거미줄 [1] 박찬민 2003-06-03 9521
64 정호승 - 사랑한다 [1] 박찬민 2003-05-10 9529
63 안도현 - 너에게 묻는다 file 머시라고 2003-04-05 9590
62 김용택 - 그 강에 가고 싶다 file 보시리 2007-05-30 9701
61 도종환 - 내가 사랑하는 당신은 박찬민 2003-04-12 9721
60 정호승 - 봄길 [3] 보시리 2005-02-11 9863
59 정호승 - 수선화에게 [1] 머시라고 2003-05-13 9926
58 황동규 - 미명에.. 보시리 2005-01-13 10431
57 도종환 - 폐허 이후 머시라고 2005-02-23 10618
56 류시화 - 들풀 [1] 머시라고 2010-05-04 10961
55 구상 - 꽃자리 [7] 머시라고 2008-05-26 11337
54 나희덕 - 오 분간 머시라고 2005-06-18 12192
53 김종삼 - 어부 [10] 보시리 2011-10-01 12453
52 다카무라 고타로 - 도정 file 머시라고 2013-07-17 12558
51 김수영 - 슬픔이 하나 보시리 2014-04-21 12565
외롭지 않으면 길을 떠나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