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 Feb, 2008

김정란 - 말을 배운 길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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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말을 배운 길들

    길들이 울면서 자꾸만 흘러갔다. 마음이 미어질듯이 아팠다.  나
  는 길들에게 말했다. 울지 말고 말을 해. 길들이 울면서 대답했다.
  우린 말할 줄 몰라. 길들이 가엾어서 견딜 수가 없었다.  내 안으로
  들어올래?  길들이 흐느끼면서, 엄마, 라고 말했다. 나는 길들을 품
  에 껴안고 대지 위에 드러누웠다.

    세상은 여전히 어두웠다.  나는 어둠 속에서 사물을 분별하는 법
  을 배웠다.  별로 어렵지도 않았다.  내 안에 들어와 순하디 순해진
  길들이 내 몸을 먹고 자라나 열 손가락 끝에다 말의 랜턴을 달아주
  었으니까.  길들은 내 몸 안에서 제 길을 따라간다. 세계의 저쪽에
  서 누군가 와서 길을 물으면, 나는 열 손가락을 좍 펴고 가만히 드
  러눕는다.  그러면 그 사람은 나를 밟고 지나가면서, 아, 열 개의
  지평선이군, 이라고 말한다.  나는 아녜요, 말을 배운 길들이에요,
  라고 혼자 생각한다.
    마을은 더욱 고즈넉해진다. 길들이 점점 하늘색을 닮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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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만지거나 눈으로 볼 수 없더라도 넷상의 세계가 어느 곳에든 엄연히 존재하는 것처럼,
내가 발 딛고 서있는 이 공간만이 내가 사는 공간은 아니었습니다.
  내 사고思考의 영역이 있고, 내 안 깊이 숨어있는 심리의 공간이 있고, 내 영혼의
자라가는 한계없는 세계와 함께.. 나의 말이 즐겨 떠돌아다니던 뒷골목도 있었습니다.

  별을 찾던 들판, 길이 누워있는 곁으로 강물이 잔잔히 적셔가던 곳.

  말을 배운 길들이 달아준 불빛이 고운 칠흑의 우주에 열 갈래로 자라가는 광경을
그려보다가 심장 언저리가 싸아해왔습니다..
  이제는 도통 찾아지지가 않아서, 길을 잃어버린 것으로 종내 포기해버렸던 나의 말들이
차원너머의 보이지 않는 공간으로 집을 찾아서 갔구나.. 싶었습니다.

  지금은 밤인데, 구름이 두껍습니다.
어두움이야 어두움인데도 그 어두움 속에서도 구름의 두께를 느낍니다.
구름을 투시하여, 나의 말들이 열 갈래로 떠올라간 그 먼 곳을 바라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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