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3 Mar, 2005

안도현 - 눈 그친 산길을 걸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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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 그친 산길을 걸으며

눈 그친 산길을 걸으며
나는 경배하련다

토끼가 버리고 간 토끼 발자국을
상수리나무가 손을 놓아버린 상수리 열매를
되새떼가 알알이 뿌려놓고 간 되새떼 소리를

이 길을 맨 처음 걸어갔을 인간의 이름이
나보다는 깨끗하였을 것이라 생각하고
소나무 가지 위에 떨어지지 않도록 흰 눈을 얹어두련다

산길은, 걸어갈수록 좁아지지만
또한 깊어지는 것

내가 산길을 걷는 것은
인간의 마을에서 쫓겨났기 때문이 아니라
인간의 마을로 결국은 돌아가기 위해서다

저 팽팽한 하늘이 이 산의 능선을 꿈틀거리게 하듯이
겨울바람이 내 귓볼을 빨갛게 달구어
나는 외롭지도 슬프지도 않다
나뭇잎 하나 몸에 달지 않아도 춥지가 않다

눈 그친 지구 위에
산길이 나 있다
나는 산길을 걸어가련다

                                                  - 안도현 '그리운 여우'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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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산행은 결국
인간의 마을로 돌아가기 위한 것

걸을수록 좁아지지만, 또한 깊어지는
나는 산길에 서 있다
나뭇잎 하나 몸에 달지 않고.

스펀지처럼 적극적으로 흡수하리라
모두에게 경배하는 마음으로

힘내자, 아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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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롭지 않으면 길을 떠나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