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 Feb, 2010

이문재 - 노독

보시리 조회 수 56484 추천 수 0 목록
□□□□□□□□□□□□□□□□□□□□□□□□□□□□□□□□□□□□□□

     노독
      
  어두워지자 길이
  그만 내려서라 한다
  길 끝에서 등불을 찾는 마음의 끝
  길을 닮아 물 앞에서
  문 뒤에서 멈칫거린다
  나의 사방은 얼마나 어둡길래
  등불 이리 환한가
  내 그림자 이토록 낯선가
  등불이 어둠의 그늘로 보이고
  내가 어둠의 유일한 빈틈일 때
  내 몸의 끝에서 떨어지는
  파란 독 한 사발
  몸 속으로 들어온 길이
  불의 심지를 한 칸 올리며 말한다
  함부로 길을 나서
  길 너머를 그리워한 죄


□□□□□□□□□□□□□□□□□□□□□□□□□□□□□□□□□□□□□□

'함부로 길을 나서
길 너머를 그리워한 죄'

삶이라는 길을 내가 자의로 집어 나선 것은 아니었는데요..
그런 기억은 읍는데요, 하여도..
멈칫멈칫.. 저 불빛이 이 여정의 의미인가를 순간순간 고민한 적은 있습니다.
이 시간과 이 장소로, 어떤 뜻을 가지고 이 길이 나를 끌고오는가
이 길이 과연 내 길인가..
그러다 저 다른 길을 남몰래 그리워한 일도 있습니다. 인정.

시간이 너무 빠르다는 뜻은 아닌, 그저 뿌옇고 모호하게 비현실적인 느낌으로
내가 서있는 현실을 한바탕의 꿈인듯 바라볼 때가 있습니다.
그런 순간이 오면 그때만큼은, 지금 겪고 있는 일이 무엇이건간에 그 무게감이
참.. 사소하게 변하는 것을 경험합니다.
욕심도, 아픔도, 깊은 그리움도, 갈등이나 기쁨같은..
내 몸 끝에서 뚝뚝 떨어지는 이 파란 노독들이 말이지요.

그런 방법은 없는 것일까..
길 끝의 등불 아슬아슬 찾아 헤메지 않게, 내 손으로 등불 반짝 켜들고,
또는 아예 이 안쪽, 심장 부근에 꿰매붙이고서
남은 길 씩씩하게 걷는 방법 같은 것 말입니다.


List of Articles
sort

최영미 - 선운사에서 file

원태연 - 한 여자를 사랑했습니다

정호승 - 또 기다리는 편지

정현종 - 섬 [2]

신경림 - 갈대

프로스트 - 가지 않은 길 [1]

안도현 - 너에게 묻는다 file

이정하 - 사랑의 우화

이정하 - 그를 만났습니다

김광욱 - 지란이 피는 천랑에서 [2]

도종환 - 가까이 다가가고 싶었지만

도종환 - 내가 사랑하는 당신은

류시화 - 목련

황동규 - 즐거운 편지 file

도종환 - 울음소리 [1]

안도현 - 기다리는 이에게

정호승 - 사랑한다 [1]

정호승 - 수선화에게 [1]

이정하 - 별 1

이정하 - 한사람을 사랑했네 3

외롭지 않으면 길을 떠나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