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7 Nov, 2004

박미림 - 알몸으로 세상을 맞이하다

머시라고 조회 수 7148 추천 수 0 목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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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몸으로 세상을 맞이하다

옷도 걸치지 않고
신발도 신지 않고
거리로 나섰다

향긋한 커피 향이 나는
커피 전문점 앞을
서성이다
문을 들어서는 순간
내가 알몸인 것을 알았다

그래 난 알몸이었지
아무것도 걸치지 않은
그런데 종업원은 내게
들어오라 손짓한다
의아해 하는 나를
안심시키듯
그냥 커피 한잔 마시자 한다

이상하지
그 종업원 눈에는 알몸인 내
실체가 보이질 않는 걸까
커피는 종업원의 진한 마음처럼
진한 향기로 나를 자극했다

알몸으로 찬바람을
세상을 맞이하는 날
이렇게 나를 위해
조건없이 커피 한잔
내미는 이가 그리운 날
커피 전문점 통문
안 과 밖에 내 모습은
두 얼굴이었다

세상의 때를 입은 나와
세상의 때를 벗은 나와
그 둘 사이에 나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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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험실에 찾아온 새벽이 전화벨을 울렸다.
술을 마신 것 같진 않은데, 성격이 사라진 목소리로 그가 말했다.
  "학교에 있을 때가 좋을 때다."

짜증. 자판기 커피 버튼을 누르면 커피가 나오는 것처럼
이 소리가 들려오면 내게선 짜증이 쏟아진다.

  "그럼 회사 그만두고 실험실 들어오세요. 저처럼 학교에 계시면서 좋을 때 맞이하시구요."

입가에만 멤돌았다.
짜증도 받아줄만한 사람에게 내는 것이고, 허심탄회한 말도 친분의 깊이만큼 나오는 것이지만, 서로 서운할 말로 맞장구치는건 어리석은 짓이다.

그도 나도 알몸이다.
알몸에서 벗어난 사람은 일이 힘들어서가 아니라
젊은 날의 자유가 그리워 학교에 있을 때가 좋을 때라고 말한다.
누구에게나 그리움이 있다는 것은 그도 안다.
그가 나보다 힘든 일에 허덕이고 있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는 듯 했다.

나도 예전에 가끔 새벽이 되면
야근하는 군대 후임에게 전화해 속없는 소리를 했다.
  "군대에 있을 때가 좋을 때다."


찬바람 속에 그 커피가
조건없이 내민 것인지의 기준은....
아니다. 모든 행위에는 조건과 선택이 존재한다.

그도 나도 알몸에서 벗어나기 위해 몸부림치고 있다.
나름대로.....
열심히 못하고 있어도, 그마만큼의 스트레스를 받고, 압박에 짖눌려 산다.

하지만 커피를 내밀었던 사람들은
알몸에서 벗어나고 싶기나 한건지 묻곤 한다.
힘겨운 일요일 하루.

♬ Sam M Lewis의 Gloomy Sund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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곤~~^▽^

November 09, 2004

알몸으로 찬바람을 세상을 맞이하는 날 조건없이 커피 한잔
내미는 이가 그리운 날...
찐하게 커피한잔 내밀께... 기둘려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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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롭지 않으면 길을 떠나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