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 Feb, 2009

이문재 - 농담

보시리 조회 수 53161 추천 수 0 목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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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농담

   문득 아름다운 것과 마주쳤을 때
   지금 곁에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하고
   떠오르는 얼굴이 있다면 그대는
   사랑하고 있는 것이다.

   그윽한 풍경이나 제대로 맛을 낸 음식 앞에서
   아무도 생각하지 않는 사람
   그 사람은 정말 강하거나
   아니면 진짜 외로운 사람이다.

   종소리를 더 멀리 내보내기 위하여
   종은 더 아파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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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득 떠오르는 얼굴..이라기보다, 문득 떠오르는 광경이 있습니다.

" 그린다는 것은 무엇이냐?"
" 그것을 어찌 제게 물으십니까?"
" 내 교수라 하나 그걸 한마디로 설명할 재간이 없어 묻는 것이다"

" 그린다는 것은 그리워하는 것이 아닐지요"
" 어찌 그러하냐?"
" 가령, '저문 강 노을 지고 그대를 그리노라'라고 읊을 때, 강을 그리는 것은
곧 못견디게 그리워함이 아닙니까."

" 계속해 보아라,"
" 그림이 그리움이 되기도 하지만, 그리움이 그림이 되기도 합니다."
" 어찌 그러하냐"

" 그리운 사람이 있으면 얼굴 그림이 되고, 그리운 산이 있으면 산 그림이 되기에
그렇습니다.   문득 얼굴 그림을 보면 그 사람이 그립고, 산 그림을 보면
그 산이 그리운 까닭입니다."

이정명 작가의 <바람의 화원>, 초입부  '생도청'에서 김홍도와 신윤복이 처음 마주하는
장면에서 나오는 대화입니다. 동명 드라마의 2 회에서도 재현되었지만, 이정명 작가의
글에서 만나는 신윤복은 더욱 초롱초롱하고 방자하며 규격의 공간에 담아 두기 버거운,
높이 튀는 공.. 아니면, 폭발성을 지닌 방사성 운석의 느낌입니다.

그건 그렇고, 오늘은 이문재 시인의 자신있는 말에 그냥 머리만 긁적였습니다.

   그윽한 풍경이나 제대로 맛을 낸 음식 앞에서
   아무도 생각하지 않는 사람
   그 사람은 정말 강하거나
   아니면 진짜 외로운 사람이다.

살다보면 가끔은 아무 생각이 안 나기를 바라며 머릿속으로 바람을 꾸겨넣기도 하는 것을.

어제는 이곳에 돌풍같은 비바람이 새벽부터 요란했었습니다.
그런 바람 하나.. 주머니에 잘 갈무리해 두었다가, 그윽한 풍경이나 제대로 맛을 낸 음식을
앞에 두었을 때 아무 생각이 나지 않도록 슬며시 머리 안으로 풀어 놓는 것도 쏠쏠히
쓸만한 일이라는 거지요.

그런데, 이 시인이 농담이라 하니, 저도 그쯤에서 별 뜻 아니라며 냉큼~
종소리보다 더 멀찌거니 내빼볼랍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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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시리

February 17, 2009

".. 그 시절 나는 모두의 별이었다..

나는 화원畵員으로서 지상의 모든 영화를 누렸다. 남들은 나를 천재라고 불렀다.
하지만 나는 그 흔한 호칭이 못마땅했다. 도화서 안에서도, 도화서 밖에서도, 허접한
장사치에서 지존하신 주상전하까지, 구실을 달지 못한 그 호칭조차 우습기만 했다.
나의 이름은 별처럼 평생을 빛났다. 빛나는 것은 별밖에 없으리라 나는 생각했었다.
그러나 내가 별이었다면 그는 밤하늘을 가르는 벼락이었다. 너무나 갑작스러워 감당할
수 없는 그 빛은 차라리 재앙이었다. 그를 둘러싼 세상에게도, 바로 자신에게도.
뜨겁지 않으면서도 모든 것을 불태워버리는 재앙, 미처 준비할 겨를도 없이 달려들어
눈을 멀어버리게 하는 재앙, 그리고 마침내는 어둠 속으로 영원히 사라져버리는 재앙.
그를 본 순간 나는 눈이 멀었다. 그라는 뜨거움은 내 가슴에 평생 지워지지 않을 깊은
불자국을 남겼다."

- 바람의 화원 '프롤로그'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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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시라고

March 17, 2009

시 마지막 구절이 참 인상적이네요.
'너무나 갑작스러워 감당할 수 없는 그 빛은 차라리 재앙'이라는 말과 함께요.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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