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 Nov, 2013

백학기 - 오랜만에 쓴 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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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랜만에 쓴 편지   


많은 날들이 지나갔다, 라고 쓴 뒤 창 밖을 본다
철새들이 날아간 하늘 밖 풍경은 구름떼들이 모여 있다
창 곁으로 다가가 구름의 얼굴, 가슴을 들여다본다
그곳에도 사람들이 살다 간 흔적들이 묻어 있어 따뜻하다
오랜만에 쓴 편지 속으로 걸어 들어가 내가 편지가 된다
편지를 부치러 오는 사람들이 없는 거리의 우체통 속으로
많은 날들이 또 구름떼처럼 지나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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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날들이 지나갔습니다.
우리 일터만 해도, 각자의 사연과 흔적들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사랑과 헤어졌다가 다시 새로운 사랑을 만났고,
어떤 사람은 25년 함께 했던 사람을 얼마 전, 멀리 보냈습니다.
아직도 밤이 너무나너무나 길어, 낮과 밤의 비율이 허벌나다 합니다.
누구는, 자신의 유산을 기꺼이 상속해주려했던 반려견이 

췌장암으로 폭풍처럼 쓰러져, 안락사시키고 돌아오는 길에 

그만 이성을 잃었다고 했습니다.


밤이 너무나너무나 길던 사람은 지난 주부터 뜨게질을 시작했습니다.
모두에게 크로셰로 스카프를 만들어 크리스마스 선물로 주겠답니다.
동성애자인 한 사람은, 이제 결혼할 수 있게 되어 행복하다더니, 

그만 헤어졌다고.. 죽을 것 같다고 울고불다가, 얼마전 

파티에서 만난 이성이 너무나 괜찮아서, 처음으로 자신의 성정체성이 

흔들렸다고 하구요.


하늘을 보고있으면, 늘 같아보이기도 하고, 단 한번도 똑같은 적이 

없는 것같기도 합니다. 땅 위를 내려다봐도 그렇습니다. 

사는 것이 다 거기서 거기같지만, 자신이 주인공인 드라마는 

그저 하나 뿐입니다.

요즘은 우체통이 늘 빕니다.
더이상, 사람들은 손편지를 쓰지 않습니다.
편지를 부치러 가는 일도 없습니다, 법적 등기물이 아니라면.
그래서 아무래도, 내가 편지가 되어보는 일도 그리 나쁘지는 않겠다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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