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는바람이 불어왔겠지.
등나무 잎들이 흔들렸다.
원재는 등꽃이 주렁주렁 매달렸던 자리를 올려봤다.
지난봄, 그 많았던 보랏빛들은 모두 어디로 갔을까?
얼마나 많은 보랏빛들이 저물고 나면 여름이 찾아오는 것일까?
얼마나 많은 눈물을 흘리고 나면 소년들은 어른이 될까?
제 몸이 아름다운 줄도 모르고 등꽃 그 빛들은 스러진다.
제 몸이 아름다운 줄도 모르고 소년들은 슬퍼한다.
비에도 지지 말고 바람에도 지지말고.
눈에도, 여름 더위에도 지지 않는 튼튼한 몸으로
원재는 등나무 그늘 아래에 섰다.
그 얼굴이 일그러지다가 그대로 멈췄다.
원재는 멍하니, 마비된 듯한 표정으로,
이제는 사라진, 그 봄날의 정경을, 바라봤다.
등나무의 색은 초록빛이고 보랏빛이고 노란빛이고 붉은빛이다.
꽃향기 머금은 가는바람이 원재와 태식의 머리 위로
보랏빛 꽃등을 떨어뜨리며 지나간다.
- 김연수 소설집『내가 아직 아이였을때』 p.253
비에도 지지말고 바람에도 지지말고 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