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2 Jul, 2006

하필이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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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년 전인가 십대들이 즐겨 부르던 유행가 중에 ‘머피의 법칙’이라는
노래가 있었다.
확실히 기억은 안 나지만 가사가 대충 이랬다.

“화장실이 있으면 휴지가 없고, 휴지가 있으면 화장실이 없고, 미팅에 가도
하필이면 제일 맘에 안 드는 애랑 파트너가 되고, 한 달에 한 번 목욕탕에 가도
하필이면 그 날이 정기 휴일이고” 등등 “무슨 일이든 어차피 잘못되게 마련이다”
라는 ‘머피의 법칙’을 코믹하게 묘사하고 있다.

이 노래에 나오는 ‘하필이면’이란 말은 분명히 ‘왜 나만?’이라는 의문을 전제로 한다.
그러니까 남의 인생은 별로 큰 노력 없어도 모든 일이 잘 되어 나갈 뿐더러 가끔은
호박이 넝쿨째 굴러 오는 것 같은데, 왜 ‘하필이면’ 내 인생만은 아무리 기를 쓰고
노력해도 걸핏하면 일이 꼬이고, 그래서 공짜 호박은커녕 내 몫도 제대로 못 챙겨
먹기 일쑤냐는 것이다.

..<중략>..

그런데 어제 저녁 초등학교 2학년짜리 조카 아름이가 내게 던진 ‘하필이면’은
전혀 그렇지가 않았다.
길거리에서 귀여운 팬더곰 인형을 하나 사서 아름이에게 갖다 주자 아름이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환한 미소를 지으며,
“그런데 이모, 이걸 왜 하필이면 내게 주는데?”하는 것이었다.
다른 형제나 사촌들도 많고, 암만 생각해도 특별히 자기가 받을 자격도 없는 듯
한데, 뜻밖의 선물을 받았다는 아름이 나름대로의 고마움의 표시였다.

외국에서 살다 와 우리말이 아직 서투른 아름이가 ‘하필이면’이라는 말을
부적합하게 쓴 예였지만, 아름이처럼 ‘하필이면’을 좋은 상황에 갖다 붙이자
나의 ‘하필이면’ 운명도 갑자기 찬란한 빛을 발하기 시작한다는 걸 깨달았다.
내가 누리는 많은 행복이 참으로 가당찮고 놀라운 것으로 변하는 것이었다.

도대체 내가 전생에 무슨 좋은 일을 했기에, 하고많은 사람들 중에 ‘하필이면’
내가 훌륭한 부모님 밑에 태어나 좋은 형제들과 인연 맺고 이 아름다운 세상을
살고 있는가.
아무리 노력해도 헐벗고 굶주리는 사람들이 그토록 많은데 왜 ‘하필이면’ 내가
무슨 권리로 먹을 것 입을 것 걱정 없이 편하게 살고 있는가. 또 나보다 머리 좋고
공부 열심히 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데 왜 ‘하필이면’ 내가 똑똑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는가.
게다가 실수투성이 안하무인인데다가 남을 위해 하는 일이라곤 하나도 없는
나, 장영희를 ‘하필이면’ 왜 많은 사람들이 도와주고 사랑해 주는가.

‘하필이면’의 이중적 의미를 생각하니 내가 지고 가는 인생의 짐이 남의 짐보다
무겁다고 아우성쳤던 좁은 소견이 새삼 부끄럽다.

- 장영희 에세이 <내 생애 단 한번> 中에서 -

..글게 요즘은 생각이 외골수로 빠져서 근가..,읽느니 이런 내용의 글이네요.^^
마치 내가 읽어주기를 기다리기라도 한 것처럼,
마치 태초부터 그렇게 작정되었던 것처럼, 내가 읽는 글에 떡하니 버티고 앉아서
또박또박 전해주는군요, 참. ^^a

하필이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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