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 Jun, 2005

만남과 이별

머시라고 조회 수 4307 추천 수 0 목록
밤이 시작된 후 견뎌왔던 시간보다
아침을 기다리는 것이 가까운 어둠
그리고 봄이었다.

고요한 기숙사 벤치에
나름대로 값비싼 술상을 차렸다.
쏟아지는 절망감에 흠뻑 젖어서
따뜻한 격려와 위로가 갈마들 만한 날
예상을 뒤엎고 불어닥친 침묵기류,
그 냉랭함에 덜덜거렸던 나만을 위한 술상.

몇 잔이나 들이켰을까.
어둠 속에서 누군가 걸어온다.
다가오더니 술상 저편에서 걸음을 멈춘다.
그리고 나를 쳐다본다.
꼴아 보는 내 눈은 해롱대는데
그 눈에선 빛이 난다.
반딧불이의 그것보다 신비한 광채.
교내에 4군데의 서식지를 가진
이웃의 토토로 짝퉁
너구리였다.

공포가 밀려왔다.
한달 전쯤,
학교 커뮤니티와 기숙사 게시판의 너구리를 봤다던 글에
광견병 옮기니 조심하라고 썼던 댓글에
이 너구리가 항의 겸 복수하러 온 것은 아닐까,, 하며..

엉겁결에 안주 하나 던져줬다.
나는 겁을 먹었고
그는 안주를 먹었다.
다 먹어갈 때쯤 또 하나.

다 먹고 날 보는 눈빛과 표정에서
그 댓글을 읽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쓴 사람이 나인지는 모르는 게 확실했다.
다행이다..

다 먹었길래
안주 하나를 더 줬다.
하나 더..
하나 더..
하나 더..

시간이 좀 더 흐른 뒤
안주를 던지며
시작된 걱정..

너구리가 이 안주에 질리면
이별할 준비를 마치기 전에
떠나가 버릴지 모른다는
쓰잘데기 없는 걱정

너구리는 떠났고,
그 자리에 찾아 든 고양이.
고양이한테 잘못했던 일은 없나?
에이~ 모르겠다.
안주 주께, 먹고 얘기하자. ^ㅁ^

다 먹고 쳐다본다.
나는 너구리보다 더 터울을 두며
안주를 건넸다.
질리지 말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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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nsh

August 05, 2005
*.131.129.24

이 아프다고 구랬는데..미안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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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롭지 않으면 길을 떠나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