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 Sep, 2004

도와주는 법

머시라고 조회 수 3253 추천 수 0 목록
  갑甲은 타인을 대할때 항상 친절하려고 노력했다. 부탁이 들어오면, '이 사람이 이런 부탁을 나에게 꺼내기 얼마나 망설였을까?'와 자신의 부탁이 거절당했던 때의 기분을 상기하며, 최대한 도움이 되려고 애썼다.

  하지만 인간마다 하루하루 주어지는 시간은 똑같이 정해져 있고, 甲이 을乙을 도와준다고 해서 甲에게 24시간이던 하루가 남을 도와준 시간만큼 추가 할당되어 25~26시간이 되는 것도 아니다. 그렇지만 甲은 자신의 일을 미루고 시간을 쪼개어 도와주면서 기쁜 마음만 가득했다. 甲은 자신이 남에게 도움이 될수 있다는 것은 본디 기쁜 일이다고 생각했다.
  그러던 중 부탁을 들어주면서 뭔가 찜찜하게 조금씩 기분이 나빠지는 경우도 많았지만, 甲은 그 기분이 설령 자신이 乙을 도와주기 싫어 만들어낸 핑계가 아닐까 하는 마음으로 늘 참곤 했다. 바빠 죽겠는데 자신(乙)을 위한 사소한 주문들을 해오면 정말 짜증이 났는데도 甲은 또 참곤 했다.

  하지만 정말 급한 것 같아 날밤 새우며 도와주다가, 같이 커피나 한 잔 할까 해서 가봤는데 게임을 하고 있는 乙을 발견했을 때 甲은 육체와 사고思考가 어떻게 반응해야 하는지, 이 순간부터의 발걸음은 어디를 향하고, 어떻게 내딛어야 하는지 모두 잊어버린, 백지화 상태가 되어버렸다.
  이미 유년시절 甲이 기억하는 구타와 영화속 모든 폭력은 乙을 수백번 강타하지만, 이성을 잃어버린 상태에서 甲이 쳤던 사고事故는 이성을 되찾았을 때 떳떳함보다 반성적으로 생각되는 것들이 많았으므로 또 참고 돌아선다(어쩌면 참는다는 것이 쌓아둔다는 의미인 것 같다).

  그런 4가지 없는 경우를 甲에게 제시한 乙은 해가 지고 다시 해가 뜨면 또 만나게 되는 사람이었다. 乙은 한동안 잠잠하다가 또 부탁을 해오곤 한다(乙의 넉살 하나는 높게 쳐줄만 하다). 甲은 또 부탁을 거절하지 못한다.

  그러던 중, 그 날이 오고야 만다. 乙로부터 유발되는 아주 사소한 짜증이었는데, 甲이 폭발해 버린다. 乙에게 받은 짜증이 가득 쌓여서 더 이상 참아낼 공간이 한계에 이르러 버린 것이다. 하지만 이번 짜증은 아주 사소한 것이었다. 乙은 의아하다.
乙 : 이 것 쪼금 해주는 게 그렇게 싫으냐?

  이 순간 甲은 처음이었던 여섯 달 전부터 지금까지 乙에게서 받은 짜증을 순차적으로 기록해두지 못했던 아쉬움을 느낀다.
甲 : (머리 삑! 돌고, 욕 나오고), 넌 왜 맨날 그런 식이야? 신발!!

  안 보고  살 사람도 아닌데 너무했나 싶은 甲은 호수龍池에 앉아 생각해 본다. 그리곤 乙의 편이 되어본다. 乙은 다급하여 甲에게 도움을 청한다. 처음 도움을 청할 때는 어렸웠지만, 의외로 甲이 잘 도와주어 나중에는 도움을 구하기가 점점 쉬워졌다. 가끔 甲에게 밑보인 짓을 하긴 했지만, 그래도 甲은 인내심이 강하고 너그러운 사람 같아 보인다. 그 후에는 어떤 일이든 甲이 도와줄꺼라는 전제前提하에 시간계획을 짜게 되었다. 근데 이 자식이 어느 날 아무 것도 아닌 사소한 것 갖고 성질내고 지랄이다. 신발!

  기숙사로 돌아와 '적게 일하고 많이 쉬어라'를 다시 읽어보고, '우아하게 거절하는 법'이라는 드라마를 보고나서도 뭔가 풀리지 않는 찜찜함이 있다. '애정의 조건', '작은 아씨들'이 끝나고 '불멸의 이순신'이 할때 쯤 신사장에게서 전화가 왔다. 기숙사 벤치에서 맥주 한 잔 하자는 것이었다. 보고 있던 프로를 녹화해 놓고 기숙사 벤치로 향했다.
  술자리에서 이런 이야기를 들려주었더니 좀 4가지 없어도 된다고 했다. 너무 친절한 척하려 애쓰지 말라고 했다. 자기도 후배한테 뭐 좀 부탁했는데 거절 당해 조금 서운하긴 했지만, 그 후배가 자신과의 관계에서 기본적인 것만 지키면 참으까마까 하는 그런 고민은 생기지 않았다고 했다. 하기사 자신이 선배에게 해줬던 것만큼 후배에게 바랄 수도 있지만, 선배에게 해주면서 느꼈던 짜증은 망각하고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중요한 것은 '도와 주느냐 마느냐'의 것이 아니라, 도움을 주면서 기분이 상하는 점은 참지 말고, 그때그때 이러이러한 점이 맘에 들지 않고 있다고 정확하게 표현하는 것 같다. 도움 뿐 아니라, 인간관계에서 뭔가 쌓아둔다는 것은 정말 끔찍한 일이 될 수 있는 것 같다. 어쨌든(애니웨이^^) 세상이 그런건 아니지만, 편하게 살려면 좀 4가지 없어도 된다. 이 글을 읽은 사람들이 앞으로 甲에게 아무런 도움도 청하지 않을까, 그게 걱정될 것 같다.
^ㅁ^,

3
profile

박지현

September 24, 2004
*.96.248.145

ㅎㅎ 머시라고님도 제가 많이 했던 고민을 하시는군요.
전 요즘은 그렇게 생각합니다.
본전 생각나지 않을 만큼만 베풀고 살자.
다음에 그 사람이 나한테 서운하게 하는 일이 있더라도
"내가 너한테 어떻게 했는데, 니가 나한테 이럴수가"라는 본전 생각이 난다면 그건 서로한테 좋은 관계는 아이더군요.
순간 순간 그 순간만 떠오를수 있게, 내가 힘들고 귀챦을 때는 도움을 청해도 "No"라고 대답하기.
내 성격 같을줄 알고, 어렵게 나한테 부탁했을 것 이라고 의미두는것도 하지 말기.
다른 사람한테 부탁을 잘 하는 사람들은 내가 아니어도, 제2의, 제 3의 사람들한테 얼마든지 도움을 청할수 있을테니까.
비록 가족일지라도, 본전 생각 나지 않을 만큼만 베풀고 살자....
이것이 결혼 15년 만에 얻은 결론이랍니다
profile

머시라고

September 25, 2004
*.131.132.223

캬아~,, "내가 아니어도" ,,, 본전,, N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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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시리

October 06, 2005
*.202.174.198

정말..글을 잘 쓰신다는 생각이 일착으로 들었고..그래서..
요즘은 통 볼 수 없다는 것이 너무 아깝다는 것이 이등 테입을 끊었으며..
박지현님의 방법대로 된다면..크게 잘못될 일은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이 연이어 뛰어듭니다..^^

한가지, 꼭 한가지가 저와는 다소 다른 의견이라면..
<본전 생각..>
글쎄~... 별로 재미있는 세상이 될 것 같지는 않네에~...라고.

이런, 속이 시원하도록 거침없이 쏟아 쓰시는 글을..
언제나 다시 볼 수 있으려나..
이런 양의 글을 쓰는데.. 수없었을 지도 모르는 수정/정정작업을 포함하면..
얼마나 긴 시간을 부으신 걸까...
정말로 쓰잘디 읍는 생각들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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