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 Feb, 2005

책, 내게로 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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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가오는 졸업식에 그동안 고마웠던 사람들에게 작은 선물이라도 하고 싶었다. 어떤 선물이 좋을지 몇 번 고민하다, 결국 병적습관처럼 책冊으로 귀결시켰다. 습관처럼 선물을 많이 해온 것은 아닌데, 몇 번 뿐이었던 선물이 거의 책이었다.

졸업식은 금요일이었지만, 오늘 선배 생일도 있고해서 월요일에 주문하려했다. 하지만 이번 주 월요일은 가정과 학교 합동으로 나의 정신을 쏙 빼놓으며 지나갔다. 늦게나마 어제 오전, 급한 마음으로 주문에 들어갔다.

우선, (결과는 아주 형편없었지만) 연속된 세미나 준비에 정신없이 지내온 터, 근래 만족스럽게 읽었던 책이 없었기에 시집으로 눈을 돌렸다. 다음으로 1일이내 출고되는 책만을 오전에 주문하면, 다음 날 받아볼 수 있었던 경험을 되새겼다. 그리고 여러 종류일 경우 발송이 늦어질 것을 염려하여, 한 권을 선정하여 통일하기로 했다.

기숙사와 실험실에 있는 모든 시집을 꺼내놓고 선정에 들어갔다. 오전이 얼마 남지 않은데다, 꼭 하나만 선택해야하는 기분이 야릇했다. 그래도 기분상 이거다 싶어 선정했는데, '4일이내 출고예정'이었다. 웁스~.

모든 시집이 몇 일 이내 출고가능인지 검색해보긴 그래서 '선정 기준표'를 만들었다. 선정기준표에는 시집을 뒤적이며 마음에 드는 시가 몇 편 수록되어 있는지를 적어갔다. 그리고 마음에 드는 시를 가장 많이 수록하고 있는 시집 순으로 1일이내 출고예정 조건을 따져 선정했다.

헌데, 예상과 달리 밤이 되었는데도 '출고 완료'라는 문자메세지는 오지 않았다. 오늘 전화로 확인해보니, 그 시집 재고가 여섯 권 밖에 없다고 했다. 아, 나의 무지와 무모함이여~! 우선 있는대로 먼저 보내주시라 부탁하고, 선배의 생일선물용 책은 구내서점에서 구입하려 했다. 그러나 무슨 정신으로 사는지, 구내서점이 닫힌 후에야 그 계획이 수면 위로 부상했다.

저녁식사 후 정월대보름달이 선명한 밤길을 나섰다. 학교 근처에도 영어책이나 공무원 수험서를 파는 서점은 많지만, 시집을 구하려면 그 골목까지 가야 했다. 보름달도 보이지 않는 좁은 골목에 이르렀을 때 서점은 불이 켜진채 잠겨 있었다. 그리고 앞 식당에서 밥 먹고 있으니 잠시만 기다리라는 메모가 붙어 있었다.

잠시라고 하기엔 발 시린게 장난 아닐 정도의 시간이 흘렀을 쯤, 알바생으로 보이는 이가 문을 열었다. 찾는 책이 있냐고 물어왔고, 둘러보겠다고 대답했다. 기다렸던 시간만큼 '잠시' 둘러보는데, 중년의 세 사람이 들어왔다. 한 사람은 서점 주인이었고, 부부로 보이는 두 사람은 오랜만에 찾아왔던 손님인 듯 했다.

잠긴 문에 붙은 메모로 내가 발 시리고 있을 때, 이 좁은 서점 안의 네 사람은 앞 식당에서 식사를 하고 있었다. '잠시' 후 알바가 먼저 나와 서점 문을 열었고, '잠시' 동안 나머지 세 사람은 술 한잔 걸친 듯 하다. 즐거운 시간이었다는 인사말을 남기고 부부로 보이는 두 사람이 떠났다. 그들에겐 그리도 정겹게 작별을 고하던 주인이, 찾아온 손님들에겐 너무도 무뚝뚝해 언짢았다.

이래저래 나도 구입할 시집을 몇 권 골랐다. 카드를 꺼내려 안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책 제목을 장부에 기입하며, 가격을 부르는 그의 입에서 술냄새가 풍겨왔다. 넣었던 손이 망설여졌다. 예전에 이곳에서 책을 구입할 때는 그냥 선불카드였는데, 지금 내 손은 몇 만원 이상 구입시마다 추가적립금을 준다고 해서 바꿨던, 인터넷서점의 멤버쉽카드를 만지작 거리고 있었다.

나름대로의 고통을 이기며 살아오다, 오랜만에 반가운 이를 만나, 식사에 곁들인 반주로 기분 좋게 취해있는 사람에게 몹쓸 짓 같았다. 이 카드 한 장이 작은 서점을 운영하는 이 사람에겐 큰 상처일 수도 있겠구나. 카드로 향하던 손을 거두고 여기저기 주머니에서 현금을 긁어모았다. 오백원의 헌신과 백원짜리들의 협동심까지 더해져 책값은 다행히 계산되었다.

백원짜리까지 긁어 책값을 계산하는 모습이 안쓰러웠는지, 갑자기 좋은 추억이라도 생각난 것인지, 무뚝뚝하던 주인장의 표정이 밝아졌다. 그리고 기다려보라 하더니 아무에게나 주지 않는 것 같은 책자 하나를 건네왔다. 책, 내게로 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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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롭지 않으면 길을 떠나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