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 Oct, 2004

열녀문 나서며

머시라고 조회 수 3584 추천 수 0 목록
  시골길을 떠돌다 보면, 그 어귀에서 열녀나 효자효녀를 추모追慕?하는 비석을 가끔 보게 된다. 오늘은 그 비석에 대해 생각해봤다. 원래 이 이야기는 근래에 생각하고 있는 주제의 한 맥락이었는데, 내 주특기인 '딴길로 새기?'가 제 역량을 발휘한 것이다. ^^

  열녀의 남녀차별적 시각을 떠나, 이런 비석은 정말 부끄럽고 웃기는 과거사를 대변해주고 있는 것 같다. 추모비란 것이 본디 어떤 행자行者나 행물行物의 일반성을 뛰어넘은 특별함에 대한 감동을 추모하기 위해 세운 것이다. 진실로 거시기하신 분들께 미안한 마음을 가지고 한 발 물러서 보면, 당시 '얼마나 열녀나 효자효녀가 없었으면 마을 어귀에 이런 비석까지 세워 추모했을까?'라는 물음을 던져보게 된다. 정말 얼마나 귀했기에 고을에서는 앞다투어 비석을 세우고, 임금은 열녀문을 하사하거나 관직까지 내어 주었을까.

  김병인 교수님께 7년전 이 물음을 받고 정말 기절하는 줄 알았다. 머리가 띵~! 해서 마비된 줄 알았으니.. 그 후로 추모비 앞에서면 진실로 의미있게 거시기했을 거라는 믿음은 접어둔 채 당시의 이야기를 내 맘로 상상해 보듯 했다. 가끔의 상상들이 문헌을 통해 사실이었다는 것을 알았을 땐 정말 으쓱하면서 신기할 때도 있었지만, 더한 씁쓸함이 남았다.

  그 중 열녀문에 대해 들여다 보자. 고을에 남편을 잃고 오랜 세월 수절守節한 부인이 있으면, 우선 '우리고을 열녀문 세우기 프로젝트' 1단계 성공이다. 다른 고을에서 임금께 올린 여인들과 겨루어지긴 하겠지만, 우선 정량적인 데이타가 뒷받침된 셈이다. 이런 여인이 없는 고을은 혼자 살다가 죽은 부인을 대상으로 하여야 한다. 낭군을 허벌나게 그리워하다가 끝내 이생을 떠났다고 하거나, 자살한 경우는 주위에서 계속되는 재가권유의 압박을 견디지 못해 목숨을 끊었다고 하면 될 것이다.

  그렇다고 열녀가 무조건 열녀가 되는 것은 아니다. '임금지정 열녀'든 '현감지정 열녀'든 간에 그녀의 열녀됨을 알리거나 소문내 줄 매개체가 필요하다. 현감에게 표창 받으려면 고을 입소문 만으로도 가능하겠지만, '임금지정 열녀'가 되려면, 임금은 물론이고 조정 대신들까지 감탄할 수 밖에 없을만큼 드라마틱하게 '열녀 신청서'를 감동적으로 작성해 줄 사람이 필요하다.

  마지막으로 제일 중요한 것은 요즘 회사에서 'CEO의 의지'라고 하는 그 부분이다. 임금이 열녀를 뽑고자 하는 의지.. 그 의지에 상품이 달라지고, 명예가 달라진다. 그 의지가 높다보니 유림들은 고을의 명예를 드높일 껀덕지를 찾느라 '열녀 프로젝트' 연구에 골머리를 앓기도 했을 것이다. 효자효녀에 비해 죽은 열녀는 증빙 첨부자료가 거의 필요없어 만들기 나름이었을테니.

  열녀 추모비 건립이 고을 사람들의 명예를 높이는 일이라니 우습다. 열녀 한 사람의 것을 그 고을 모든 사람의 기본적 모습인양 일반화시키려 하는 꼴이라니. 마을에 열녀비 하나 세워놓고나면 짊 하나 던 것처럼 개운했을까? 열녀비가 세워진 마을에는 열녀강박증이 사라져 사랑의 깊이와 상관없이 더 이상 열녀?할 필요가 없어진 것인가. 다른 사람들에게 '열녀'라 칭해지는 것은 또 얼마나 무서운 일인가..

  열녀문이나 열녀비는 그렇게 과거로만 존재하는가. 면에 열녀문이나 비가 있으면 면서기는 그것이 문화재로 등록될 수 있게 강요받아야 하고, 군서기는 그 군문화재가 더 높은 지정등급 문화재가 될 수 있도록 노력을 경주해야만 한다고 주위에서 압력을 받는다. 문화관광부와 여성부에서 입장이 다르고, 시대상황에 따라서도 다르게 평가되겠지만, 열녀문을 뒤돌아서는 내 마음은 늘 씁쓸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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