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 May, 2007

박성우 - 도원경(桃源境)

보시리 조회 수 14143 추천 수 0 목록
□□□□□□□□□□□□□□□□□□□□□□□□□□□□□□□□□□□□□□

   도원경(桃源境)


    뻘에 다녀온 며느리가 밥상을 내온다

    아무리 부채질을 해도 가시지 않던 더위

    막 끓여낸 조갯국 냄새가 시원하게 식혀낸다

    툇마루로 나앉은 노인이 숟가락을 든다

    남은 밥과 숭늉을 국그릇에 담은 노인이

    주춤주춤 마루를 내려선다 그 그릇 들고

    신발의 반도 안 되는 보폭으로 걸음을 뗀다

    화단에 닿은 노인이 손자에게 밥을 먹이듯

    밥 한 숟갈씩 떠서 나무들에게 먹인다

    느릿느릿 빨간 함지 쪽으로 향하던 노인이

    파란 바가지 찰랑이게 물을 떠다가

    식사 끝낸 나무들에게 기울여준다

    손으로 땅의 등을 가볍게 토닥여주는 노인,

    부축하고 온 지팡이가 다시 앞장을 선다

    어슬렁어슬렁 기어온

    고양이 한 마리가 나무 밑동으로 스며든다

    툇마루로 돌아와 앉은 노인이 예끼, 웃는다


            - 시집 ‘가뜬한 잠’(창비) 중에서 -


□□□□□□□□□□□□□□□□□□□□□□□□□□□□□□□□□□□□□□

도원경이라면, 동진 때 시인 도연명의 ‘도화원기’에서 유래한 동양적 이상향이 아니던가.
삶이 팍팍할수록 무릉도원을 꿈꾸지 않은 이 누가 있을 것인가.
시제에 가슴 부풀어 연마다 행마다 뒤져 보았지만 흐드러진 복사꽃은 고사하고
낙화 한 잎 보이지 않는다.
외려 ‘뻘’과 ‘더위’와 ‘주춤주춤’과 ‘신발의 반도 안 되는 보폭’만 도드라질 뿐이다.
그런데도 속은 느낌은커녕 ‘참으로 도원일세!’ 고개가 끄떡여지는 것은 무슨 까닭인가?
복사꽃 핀다고 다 무릉이 아니듯, 도원이 지리부도에 나오지 않는 까닭을 새삼 알겠네.
  
   - 시인 반칠환


" 니~들은 나무 키울 자격 없어. 거름을 줘야지~
지들은 배고프면 밥 챙겨먹구, 왜 나무엔 거름을 안 줘~ "
..라는 말이 들린걸까요.
나른한 환각처럼, 현실의 껄끄러움을 덮어버리는 무심한 반쪽짜리 보폭에
하루 마무리를 맡기고 깊은 잠 속으로.

천천히 낭송하려는 속셈으로 행간 폭을 넓혔습니다..
List of Articles
번호
130 유지소 - 박쥐 file 보시리 2007-07-28 7094
129 김정란 - 기억의 사원 file [2] 보시리 2007-07-11 6961
128 기형도 - 바람은 그대 쪽으로 file 보시리 2007-06-25 15792
127 홍윤숙 - 과객 file 보시리 2007-06-18 6868
126 함민복 - 산 file 보시리 2007-06-08 7783
125 오상순 - 짝 잃은 거위를 곡(哭)하노라 [3] 보시리 2007-06-06 13826
124 신달자 - 불행 보시리 2007-06-03 9010
123 김정란 - 눈물의 방 보시리 2007-06-01 6836
122 김용택 - 그 강에 가고 싶다 file 보시리 2007-05-30 9691
121 함민복 - 긍정적인 밥 보시리 2007-05-27 7683
120 문병란 - 돌멩이 (반들반들) 보시리 2007-05-27 7222
119 천상병 - 나무 (기다, 아니다) file [3] 보시리 2007-05-24 7291
118 천양희 - 좋은 날 보시리 2007-05-21 6734
117 장정일 - 내 애인 데카르트 보시리 2007-05-17 6532
116 유지소 - 별을 보시리 2007-05-14 6234
» 박성우 - 도원경(桃源境) 보시리 2007-05-11 14143
114 천양희 - 외딴 섬 보시리 2007-05-09 6695
113 안도현 - 섬 [1] 보시리 2007-05-06 6959
112 박남수 - 아침 이미지 보시리 2007-04-30 6724
111 문정희 - 고독 보시리 2007-04-29 6974
외롭지 않으면 길을 떠나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