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 Feb, 2010

이문재 - 노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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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노독
      
  어두워지자 길이
  그만 내려서라 한다
  길 끝에서 등불을 찾는 마음의 끝
  길을 닮아 물 앞에서
  문 뒤에서 멈칫거린다
  나의 사방은 얼마나 어둡길래
  등불 이리 환한가
  내 그림자 이토록 낯선가
  등불이 어둠의 그늘로 보이고
  내가 어둠의 유일한 빈틈일 때
  내 몸의 끝에서 떨어지는
  파란 독 한 사발
  몸 속으로 들어온 길이
  불의 심지를 한 칸 올리며 말한다
  함부로 길을 나서
  길 너머를 그리워한 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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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부로 길을 나서
길 너머를 그리워한 죄'

삶이라는 길을 내가 자의로 집어 나선 것은 아니었는데요..
그런 기억은 읍는데요, 하여도..
멈칫멈칫.. 저 불빛이 이 여정의 의미인가를 순간순간 고민한 적은 있습니다.
이 시간과 이 장소로, 어떤 뜻을 가지고 이 길이 나를 끌고오는가
이 길이 과연 내 길인가..
그러다 저 다른 길을 남몰래 그리워한 일도 있습니다. 인정.

시간이 너무 빠르다는 뜻은 아닌, 그저 뿌옇고 모호하게 비현실적인 느낌으로
내가 서있는 현실을 한바탕의 꿈인듯 바라볼 때가 있습니다.
그런 순간이 오면 그때만큼은, 지금 겪고 있는 일이 무엇이건간에 그 무게감이
참.. 사소하게 변하는 것을 경험합니다.
욕심도, 아픔도, 깊은 그리움도, 갈등이나 기쁨같은..
내 몸 끝에서 뚝뚝 떨어지는 이 파란 노독들이 말이지요.

그런 방법은 없는 것일까..
길 끝의 등불 아슬아슬 찾아 헤메지 않게, 내 손으로 등불 반짝 켜들고,
또는 아예 이 안쪽, 심장 부근에 꿰매붙이고서
남은 길 씩씩하게 걷는 방법 같은 것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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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롭지 않으면 길을 떠나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