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 Feb, 2010

이기철 - 유리(琉璃)에 묻노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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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리(琉璃)에 묻노니

  내 이제 조그맣게 고백하노니
  나는 꽃보다는 누추하게 살아왔고
  먼지보다는 깨끗하게 살아왔다
  별빛보다는 어둡게 살아왔고
  뻘물보다는 정결하게 살아왔다

  순수를 향해 경배하던 오랜 시간들
  명징을 위해 손 모으던 무수한 기도를

  그러나 무지개를 보면 나는 너무 누추하게 살아왔고
  폭포를 보면 나는 너무 안개처럼 살아왔다
  이슬을 보면 나는 너무 뻘물로 살아왔고
  유리를 보면 나는 너무 진흙으로 살아왔다

  나는 모든 노래를 부르지 않았고 모든 시를 읽지 않았다
  모든 지혜에 익숙하지 않았고 모든 경전에 탐닉하지 않았다
  바다가 보낸 폭풍을 미풍의 비단으로 만드는 들판의 마음을 알지 못했고
  들판 가운데 느티나무를 키우고 댕기꽃을 밀어올리는 흙의 힘을
  깨우치지 못했다

  내 길러온 사색이란 냉이꽃의 향기에 미치지 못했고
  내 키워온 순수란 풀빛의 겸허에 이르지 못했다

  나는 이제 나를 나락으로 밀어던질 것인가
  저문 들에 홀로 서서 저주의 노래를 부를 것인가
  내일 아침을 위해 마당을 쓸 것인가
  추운 희망에게 입힐 목이 긴 털옷을 짤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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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민도 고민 하는 사람이 한다고.. 사색이던, 시 읽기이던, 지혜의 갈구이던 뭐던..
저로서는 여기에 뭐라 말붙일 건더기가 읍는 관계로다가.. ^^

한정되어있는 시간, 한정되어있는 능력, 한정된 공간과 매우 한정된 통장.. 이런 것들의 시소놀음 안에서 한계있게 사는 우리로서는 그 고민 자체가 사치처럼 느껴질 때가 많이 있거든요.
가능하면 생각하면서 살려하고, 가능하면 나의 존재가 이 행성 위에 없는 것보다는 나은 존재로 남아있는 것에만도 온 힘이 다 들기도 하니까요..
그러면서도 이기철 시인의 이 괴로움이 오늘밤, 밖에 흔들어대는 저 비바람보다도 더 저를 흔들었습니다..

이럴 즈음이면 불현듯, 오래전에 보았던 영화가 떠오릅니다.
로빈 윌리엄스가 Prof Keating 으로 분하여 수많은 게으른 영혼들을 들었다 놨다 했던
'시인이 죽은 사회' 입니다.

  Gather ye rosebuds while ye may,
  Old Time is still a-flying;
  And this same flower that smiles today
  Tomorrow will be dying.

오늘, 나를 향해 웃고있는 이 꽃들이 내일은 지고 없을 것이니, 꽃을 거두려거든 할 수 있을 때, 지금 하라는.

그는 학생들을 데리고, 오래 전에 이 학교에 다녔던 선배들의 사진 앞에 섭니다.
그리고 그 선배들의 목소리를 빌려서 속삭입니다.
오늘에 충실해라, 오늘을 특별하게 만들어라.. 오늘은 흘러가면 사라지고 남지 않는다..
Carpe Diem.

그때, 그 장면에서는, 아이들에게 전하는 키팅교수의 말이 충분히 납득 가지만, 지금 내가 서있는 이 자리에서의 그 말은 다소 해석을 달리하게 되기도 합니다.  때로, 오늘이 '오늘 하루만을 위한 오늘'이 아닐 수도 있고, 게다가 또, 그 '특별함'의 내용조차도 변화해가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오늘은 지인의 어머님께서 돌아가셔서 장례식에 다녀왔습니다.
긴 하루의 일을 마치고 피곤한 나에게 필요한 것은 휴식이었지만, 그 휴식을 유보하고 무겁게 내리누르는 장례식장에서 지인의 어깨를 안고 같이 있어주는 일이.. 나에게는 중요한 일이었습니다.

어제는, 지난 달에 일을 그만두고 사표를 내던진 직장동료를 만났습니다.
차 한 잔을 앞에 두고, 그동안 미처 알지 못했던 그 가슴앓이들을 들어주었습니다.  그를 만난 시간만큼은 일을 하지 못했기에 경제적으로 생산적이지 못한, 굳이 말하자면 손해보는 시간이었습니다.

그동안, 저금통을 만들고 자꾸 자꾸 그 안에다가 구좌에서 얼마씩 떼어 밀어넣었었습니다.
그 기간이 길어지니 그 양도 늘어났습니다.
그런데 흥미있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수중에 없을 때는 참으로 너무나 중요하고 대단한 것 같던 그 녀석이 막상 소유안에 들어오니 그저 하나의 숫자에 지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숫자가 늘어날 때에 느끼는 짜릿한 감정의 기간은 참으로 짧았습니다.
아... 결국, 이 숫자가 내가 꽉 잡을 내 꿈이 될 수는 없겠구나..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Seize the day.
지나간 어제는 그저 바다로 흘려보내고, 나는 '오늘을 붙들어야 하는' 건가봅니다.
후회는 오늘을 낫게 하기위한 목적이 아니라면 쓸모가 없지 않을까..
후회가 '오늘을 부숴뜨리는 것'이라면 차라리 없는 것보다 못하지 않을까..

오늘을 따뜻한 긍정의 손으로 잡고 싶습니다, 그 긍정의 대상중 가장 먼저 그 은혜를 입을 사람은 어쩌면 나 자신일 것입니다.
내가 먼저 나를 인정해줘야 내 긍정의 손의 악력이 강해질 것 같아서..

  나는 이제 나를 나락으로 밀어던질 것인가
  저문 들에 홀로 서서 저주의 노래를 부를 것인가
  내일 아침을 위해 마당을 쓸 것인가
  추운 희망에게 입힐 목이 긴 털옷을 짤 것인가

화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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