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 Oct, 2008

바이러스 감염주의보

보시리 조회 수 2351 추천 수 0 목록

 

베토벤 바이러스 5회, 14 분즈음부터

 

연주회 시작 4 시간 전.

정직해제후 복귀한 첫 날, 건우는 내리쏟는 폭염속에, 그날 있을 연주회를 포기한 채

낙담된 심정으로 신호등이 고장난 복잡한 사거리에서 교통정리 중이다.

그 사거리 한 편에서 건우를 강한 눈빛으로 보고있던 강 마에(스트로). 다가온다.

 

강마에 - 폼이 멋진데. 내가 가르쳐준 바톤 테크닉을 여기서 써먹는 거야?

 

건우 - ....(말없이 수신호만 계속한다)

 

강마에 - 공연날짜 하나 못 챙기는 멍청한 널 위해 말해준다면, 공연시작은 6시고,

            니 솔로는 2부 첫 곡이야.

 

건우 - ....

 

강마에 - 행복해?

 

건우 - (쳐다본다)

 

강마에 - 고장난 신호등 대신해서 허우적거리고, 매연냄새에 찌들어가는게 행복하냐구.

         아~! 물론 인정해. 사람은 누구나 제각각이라서, 돈이 최고인 사람, 김치 한 조각에

         밥만 먹어도 되는 사람. 그 돈 다~ 모아서 이디오피아 난민에게 보내놔야 다리 뻗고

       자는 사람, 다양하지. 옳고 그를 건 없어. 다 자기 가치에 따라 살 뿐이야.

       .....그래서 넌~.  강건우는~.  니 가치에 따라~.  지금 이 순간~. 행복하냐고.

 

(건우, 대답 못하고 당혹스럽게 바라본다. 좌우에서 차들 밀리고, 건우 서둘러 수신호 바꾸어

차들 가게 한다.)

 

강마에 -  하나만 물어보자. 지휘 배우고 싶다는 건?

 

건우 -  ... 배우고 싶었습니다.

 

강마에 - 근데?

 

건우 - (굳은 결심의 표정으로).. 꿈으로 그냥 놔둘겁니다.

 

강마에 -  꿈?

        그게 어떻게 니 꿈이야, 움직이질 않는데.

        그건 별이지, 하늘에 떠있는. 가질 수도 없는, 시도조차 못하는, 쳐다봐야만 하는 별.

        누가 지금 황당무계 별나라 얘기 하쟤?

        니가 뭔갈 해야 될 거 아냐? 조금이라도 부딪히고 애를 쓰고, 하다못해 계획이라도

        세워봐야 거기에 니 냄새든 색깔이든 발라질 거 아냐?

        그래야 니 꿈이다 말 할 수 있는 거지, 아무거나 갖다 붙이면 다 니 꿈이야? 

        그렇게 쉬운 거면 의사, 박사, 변호사, 판사..  몽땅 갖다가 다 니 꿈 하지, 왜?

 

건우 - ..........

 

강마에 - (보다가 속상하고. 진심담아) .. 꿈을 이루란 소리가 아냐. 꾸기라도 해보라는 거야.

 

건우 - ( 핼쓱해지며 갈등 섞인 얼굴.)

 

강마에 - 사실, 이런 얘기도 다 필요없어, 내가 무슨 상관이겠어, 평생 괴로울 건 넌데.

 

건우 - (본다)

 

강마에 - 난 이 정도밖에 안되는 놈이구나. 꿈도 없구나, 꾸지도 못했구나.

          삶에 잡혀 먹혔구나.. 평생 살면서 머리나 쥐어 뜯어봐.

          죽기 직전이나 되서야 '지휘~~!!' 단발마의 비명 정도 지르고 죽던지 말던지.

 

(말 마치고 바로 차도 뚫고 휘적거리며 멀어지는 강마에.)

 

 

루미와 단원들은 여전히 비어있는 희연의 빈자리를 보며 당혹스러운데, 느닷없이 삐이이익~!!

귀를 찢을 듯한 이명이 들려온다. 당황하여 귀를 감싸는데, 이명이 사라지지를 않는다.

 

루미 - (..이게 뭐지..)

 

귀를 감싼 채 하얗게 질려 서있는 루미.

강마에는 관중을 향해 인사하고 돌아서서 악장인 루미에게 악수하며 인사하다가 멈칫한다.

루미는 바들거리며 떨고 강마에를 바라본다.

 

강마에 - 무슨 일이야?

(강마에의 입술이 움직이지만 소리를 들리지 않고. 점점 빠르게 뛰는 심장.)

루미 - ..선생님.. 어떻해요..귀가.. 안들려요..

 

강마에, 놀라 굳어지는 표정, 그러나 곧 돌아서서 지휘석으로 올라서고 단원들을 착석시킨다.

그리고 바통을 들고 움직이기 시작한다.  평화스럽게 흐르는 오보의 선율 속에 루미는

불확실하고 불안한 표정으로 다른 단원들의 모습을 훌끔 둘러보며 울 것 같은 표정으로 연주를

시작한다.

 

흔들리는 루미의 시선.. 다른 사람들을 바라보아도 웅웅댈 뿐 도무지 맞는 것인지 아닌지

알 수가 없다,

급히 자신의 악보를 보지만 이젠, 어디를 연주해야 하는지도 모르겠다. 

점점 더 당황하고 허둥대는 루미.

연주하는 다른 단원들 사이로 영문도 모른 채 불안감이 퍼져간다.

 

 

혼잡한 사거리.

빵~빵.. 차들이 혼란스럽게 막힌 사거리에 석상처럼 서있는 건우.

마치 갈 방향을 잃은 여행자와 같은 표정이다.

 

그리고 느닷없이, 시끄러운 소음 속에 한줄기 차가운 시냇물처럼 파고드는 음악..

그의 눈이 번쩍 뜨이며 그 음악의 근원을 찾아 정신없이 두리번댄다, 그의 오케스트라가

연주하는 넬라환타지아가 곁에 정체되어 서있는 차의 라디오에서 흘러나온다.

 

음률 속에 불현듯, 그의 주변 풍경이 바뀐다.. 푸르고 평화로운 산. 흐르는 강물안에

그가 서있다.

새들의 우짖는 소리, 바람 소리..

 

난 지금 여기서 뭘 하고 있는거지..?

건우는 손에 들고 있는 빨간 교통신호봉을 들여다보다가.. 물 속으로 놓아버린다, 그리고..

뛰기 시작한다. 평화로운 전원의 음악은 계속 흐르고, 그는 경찰모자도 벗어 던져버린다.

 

 

연주회장.

살짝 인상이 찌푸려지며 바라보는 강마에의 시선. 더욱 더 빠르게 터질 듯이 뛰는 심장.

순간, 루미의 머릿 속에 선명하게 와서 박히는 소리가 있다.

 

강마에 - ( 어이,  쌈닭!!)

루미  - ??

눈을 들어 강마에를 바라보니 그가 지휘하면서 루미를 주시하고 있다.

 

강마에 -  (어딜 보는 거야. 날 봐야지.)

              (나만 따라와, 그럼 돼.)

 

그가 주시하면서 왼손을 뻗어 루미를 향하고, 루미만을 위해 박자를 이끌어준다.

그 박자에 이끌려 간다.

 

 ( 좀 더 부드럽게. 슬로우~..)

 ( 더 작게.. 아득히 멀~리 들려오는 느낌으로..)

 

루미, 더욱 집중한다.

 

 ( 그래. 그렇지. 잘 하고 있어, 쌈닭.)

 

루미, 자신감이 붙는다. 강마에의 입가에 살짝 번지는 미소.

조바뀜 되면서 루미의 귀로 조금씩 흘러들어오는 음률. 루미는 놀라지만 더욱 열정적으로

연주를 한다.

강마에의 손은 여전히 루미를 향하여 리드하고 그의 손길에 집중하는 아름다운 교감.

 

넬라환타지아가 끝나고 박수가 터진다.

루미는 벅찬 눈길로, 믿겨지지 않는 듯 멍하게 강마에를 바라본다.

강마에는 쏟아지는 갈채를 받으며 지휘석에서 내려와 악장인 루미에게 인사의 악수를 한다.

 

강마에 - 아,아. 마이크 테스트. 쌈닭. 똥개. 멍청이. 바보.

 

루미 - (멋쩍게 웃으며).. 이제 들려요.

 

강마에는 돌아서서 관객을 향해 인사를 하고, 루미는 단원들과 함께 활로 두드려 인사하면서

강마에의 뒷모습을 가만히 바라본다.

 

 

요즘, 빠져있는 드라마입니다.

마음 한 켠에 키워온 보잘 것 없는 화분 하나.. 꿈.

 

<그게 어떻게 니 꿈이야, 움직이질 않는데.>

 

이 말이 날 선 비수처럼 가슴에 박혀 들어왔습니다. 그리고..

 

지금도 그 꿈의 한 귀퉁이에 매달려 절박한 애정을 쏟아붓고있는 자신이 고스란히 그들과

대치됩니다,

치매에 잡혀버린 김갑용 오보, 불광동 휘발유 트럼펫, 정희연 ㄸㄸㅇㄹ, 말 짤라먹는 이든이..,

그리고, 청聽신경에 종양 달고 사는 미친 공무원, 두루미.

이루어질 듯.. 잡으면 신기루인 듯, 타들어가는 듯한 심정. 2% 늘 부족해왔던 재능에 대한 갈증.

강마에는, 꿈을 꾸기라도 해보라지만 그 말조차, 재능있는 사람을 위한 전유물같이 들립니다.

 

늘.. 연주회를 꿈꿉니다.

관객, 열기. 스포트라이트. 정적. 긴장. 그 등을 타고 흐르는 화성和聲의 전율. 갈채..

그리고, 허탈.

남는 것이라고는, 별로 믿을 만한게 못되는 기억의 한 편린뿐인 순간의 미학.

 

그래서 이 드라마가 진행되는 내내.. 같이 웃고 울면서, 안타깝고 괴로와하면서, 푸욱~빠져서

지내고 있습니다.

 


profile

머시라고

October 29, 2008
*.147.137.46

보시리님의 연주회에 꼭 참석해보고 싶습니다.ㅎ
긴 대사 올려주셔서 명대사 동영상에 유용하게 사용했습니다.
저는 깜빡하고 넘겨버렸던 장면인데, 감사합니당. ^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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