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 Sep, 2008

그래도 나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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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해 바뀌면 예순 셋, 그리고 넷, 다섯, 여섯..

        그렇게 무심한 세월에 실려 늙어가겠지.

        잘 살았달 것도, 못 살았달 것도 없는 그저 그런 한평생.

 

        그래... 그냥 이렇게 살다 가는거지, 뭐.

        이만해도 감사해야지.

        그래, 감사해야지, 하지만 다음 생애에는.. ㅎㅎㅎ...

 

        나도 내 이름 석자로 불리우면서 한번 살아보고싶다.

 

  - 드라마 '엄마가 뿔났다' 마지막회, 한자의 ending narration -

 

 

발칙한 생각.

 

60세을 넘기고, 이미 주변 사람들의 머리 안에 고착된 '어머니'라는 명사가 내포하는 이미지를 발칙하게 부인하면서, 한자는 지난 40 년간 유보해두었던 '자아'라는 명찰을 꺼내들고 한시적 독립을 선언했었습니다.

 

그 독립은, 고결한 왕비족인 고은아의 '이미 확보'되다 못해 다른 사람들의 독자적 존재의미까지도 담보로 틀어쥐고 있었던 그것과는 애초, 시작부터가 다른 뜨거운 독립이고 가출이었습니다.

 

세대가 다른 자신이, 어째서 지금까지 그것을 조금이라도 한 숟가락씩 떠담지 못하고 미련하게 살지 않을 수 없었는가와, 왜 이제와서 이미 길들여진 가족들에게 부재로 인한 민폐(?)를 끼치면서까지 받아내고 싶은가에 대해 그다지 친절한 설명을 베풀지 못한 한자였던 관계로, 한자의 발칙한 생각은 초반의 어느 정도 수긍하던 제 마음까지도, 결국 선을 넘은 이기적인 발상으로, 은아의 민폐에 비교하여 별로 낫다고 편들 수 없도록 만들었습니다.

 

한자는, 1년에서 3 개월로 단축된 발칙한 반란을 고수하면서도 수시로 집으로 달려가야 했고, 눈 감고, 귀 막으며 자신이 동경해 온 자유를 실행하는데에 끝도 없는 장애물과 맞닥드리게 됩니다.

그에게 끝내 백기를 들게 한 것은 며느리의 유산조짐과 그에 맞물린 아들의 극렬한 비난이었습니다만.

그러나 사실, 그것은 아들의 비난이었다기보다, 한자 자신이 스스로에게 더이상 납득을 시킬 근거를 찾지 못한 탓이 아니었을까요. 아직은 그런 세대였던 어머니라서.

 

만약 내게 다음 생애가 주어진다면 내가 바라는 것은 무엇일까. 그런 생각을 해봤습니다.

 

한자와는 달리, 내 이름 석자로 불리워 봤고, 그 이름을 가지고 일을 해왔고, 세금보고를 했고, 책임이 주어졌고, 적당량의 상벌도 경험해봤고. 치열하게 어떤 일에 매달려도 봤고, 마음 뛰게 하는 무엇을 위해 정열적으로 매진도 해봤고, 하고 싶고 원해서라기보다 그것이 나에게 대한 기대라는 것을 아는 탓에 누군가를 위해 내가 꿈 꾼 무언가를 내려놓기도 해봤고.

 

누군가를 위해 나 자신을 확실히 파묻는.. 모, 그런 것도 해봤고.

뜻하지 않은 장소에서의 뜻하지 않은 만남..그런 것도 있었고, 마음에 간절히 원하는 것.. 갈망이라는 것도 느껴봤고, 또한 상실이라는 암흑의 공간도 대책없이 흘러다녀봤고..

 

굳이 다음 생애까지 가지 않아도 이만하면 나름.. 드라마틱하고 우여곡절 구비구비한 재미있는 삶을 살았다는 생각을 합니다.

흠.. 나름 괜찮았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

 

 

 

                                                                                           이수동 화백, 꿈


profile

머시라고

October 04, 2008
*.147.137.46

엄마가 뿔났다, 소감문이 방송내용보다 더 감동적이네요.
이런건 청출어람 말고 뭐라 하던데.
제가 드라마 쓸 때도 보시리님 글 같은 분위기를 이끌어 낼 수 있을런지 걱정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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