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깊이 울게된 乾川이 소리를 낸다…詩가 흐른다

어릴 때 나는 유난히 울음이 많았다. 슬프거나 아프지 않을 때에도 공연히 눈물을 글썽거리기 일쑤였다. 노을 빛을 우두커니 바라보다가 눈가에 물기가 맺혔고, 심중의 말을 간곡하게 몇 마디 꺼내려 해도 울먹임이 앞을 가로막았다. 너무 아름답거나 간절한 것을 보며 어린 나이에 왜 환희보다 아련한 슬픔을 느꼈는지는 알 수가 없다. 다만, 그 툭하면 터지던 울음이 내가 문학이라는 불꽃을 지피는 데 주된 연료였을 거라는 생각이 들곤 한다.

그렇다고 해서 내가 감상적 낭만주의자란 뜻은 아니다. 나는 내 문학이 만물에 대한 눈물 글썽임에서 시작되었다는 것을 의식하면서부터 오히려 그 눈물을 말리고 식히는 데 애를 썼다. 그래서인가. 언제부턴가 웬만한 일에는 울지 않게 되었다. 견디기 어려운 치욕이나 슬픔 앞에서도 울음은 속에서만 아우성칠 뿐 좀처럼 목을 밀고 올라오는 일이 없어졌다.

  " 슬픔을 섣불리 표현할 수 없을 때
    자신이 아픔에 덜 열중할 때
    비로소 만물의 울음소리가 들린다."

홍사용의 ‘나는 王(왕)이로소이다’는 장황하고 과장된 시이기는 하지만, 삶이 얼마나 슬픔으로 점철된 것인가를 말하면서 그것을 잘 다스리라고 넌지시 일러준다. 어머니는 어린 아들의 귀밑머리를 단단히 땋아주면서 “오늘부터는 아무쪼록 울지 말아라”고 말한다. 그날부터 눈물의 왕은 “어머니 몰래 남 모르게 속 깊이 소리없이 혼자 우는 그것”이 버릇이 되었다는 내용이다. 누구에게나 자의든 타의든 이렇게 마음의 물줄기를 감추어야 하는 시기는 찾아오기 마련이다.

따라서 눈물이 말랐다는 것은 세상사에 무심해져 가는 것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오히려 밖으로 흐르지 못함으로써 내면으로 더 깊게 숨어버린 물줄기 같은 게 있는 듯하다. 그런 의미에서 시인은 저마다 마음 속에 건천(乾川)을 하나씩 품고 사는 존재들이라고 할 수 있다. 슬픔을 섣불리 표현할 수 없게 되었을 때, 자신의 슬픔에 덜 열중하게 되었을 때, 시인으로서는 다른 존재의 울음소리에 좀 더 귀 기울일 수 있게 되는 것 같다.

꽤 오래 전 일이다. 1박2일 일정으로 열리는 문학행사에서 아름답고 화사한 한 여자를 보았다. 먼 발치에서 바라보았을 뿐 그녀와 인사를 제대로 나눈 것도 아니었다. 그런데 밤에 술자리가 길어지면서 술에 취한 그녀가 갑자기 울음을 터뜨리며 몸부림을 쳤다. 나는 그녀가 왜 우는지 알 수 없었지만, 짙은 화장기 아래 숨어 있던 아픈 영혼을 모두 보아버린 느낌이었다.

그녀를 간신히 숙소로 부축해 들어와 달래고 난 뒤 나는 우두커니 천정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때였다. 갑자기 뜨거운 기운이 목을 밀고 올라왔다. 내 안의 마른 물줄기가 갑자기 격랑을 만났을 때처럼 수압이 높아지면서 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잠든 그녀의 등 뒤에서 나는 영문도 알 수 없는 울음을 밤새 그치지 못했다.

그 낯선 여자의 아픈 삶을 속속들이 알지도 못하면서 나는 왜 그녀의 슬픔이 나와 무관하지 않다는 느낌에 사로잡혔던 것일까. 흔히 시인을 곡비(哭婢)에 비유하지만, 그 날의 경험이 내게는 우는 자로서의 운명을 받아들이는 일종의 통과의례 같은 것이었다.

이제 생각해보니 내 시의 팔 할은 슬픔이나 연민의 공명(共鳴)에서 시작된 게 아닌가 싶다. 내 안의 슬픔이 다른 슬픔과 만나 서로 스미고 어루만질 때 흘러나오는 언어. 또는 존재와 존재가 서로 삐걱거리고 뒤척이며 내는 소리들. 시는 그런 다양한 울음소리를 받아적은 것에 다름 아니다. 그러니 시인이 가장 귀 기울여야 할 것은 만물이 내는 울음소리의 섬세한 리듬과 결일 것이다.

  " 실핏줄처럼 뻗은 고통의 물줄기
    바라건데 강물 하나 만들어내길…"

어느 기자가 마더 테레사에게 “수녀님은 무어라고 기도하십니까?”라고 물었다고 한다. 그 질문에 테레사 수녀는 조용히 고개를 숙이고 “저는 듣습니다”라고 대답했다. 의아해 하는 기자가 그녀에게 다시 물었다. “그러면 수녀님이 들을 때, 하나님은 무어라고 말씀하십니까?” 이 질문에도 역시 그녀는 “그분도 들으십니다”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기도든 시든 고백과 발언의 양식임이 분명하지만 말하기 못지않게 듣는 일이 중요하다는 것을 일깨워주는 얘기다.

‘나는 왜 문학을 하는가’라는 질문에 대해서 하나의 답을 내놓아야 한다면, 먼저 세상의 모든 소리들을 잘 듣기 위해서라고 대답하고 싶다. 특히 살아 있는 존재들이 내는울음소리를 나는 좀 더 가까이 다가가 듣고 싶다.

사물과 자연을 통해 누군가 얘기하고 있는 것을, 아니 사물 자체가 말하거나 울고 있는 것을 잘 듣고 있으면 그 속에는 이미 시가 흐르고 있다. 그 소리들을 받아 적어서 한 편의 시로 완성하고 문예지에 발표하고 시집을 묶는 행위는 어찌 보면 부차적인 것에 불과하다. 시인이 가장 충실하게 살아 있는 순간은 만물의 울음소리를 자신의 몸으로 가장 온전하게 실어낼 수 있는 때이다. 마음 속의 건천(乾川)이 소리를 내기 시작할 때, 죽은 것처럼 보이던 존재가 되살아 나고 보이지 않던 것도 보이기 시작한다.

몇 해 전, 그리 크지 않은 폭포를 찾아 강원도 산길을 올라간 적이 있다. 어느새 인가도 사라져 버리고 가파른 산길에는 사람도 보이지 않았다. 분명히 이 길로 올라가다 보면 폭포가 나온다고 했는데, 물소리조차 들리지 않았다. 길을 잘못 든 건 아닐까 불안한 마음이 들었다. 마침 바위에 앉아 있는 한 노인이 보였고, 나는 노인에게 다가가 그 폭포에 대해 여쭈어 보았다. 노인은 더 올라가도 폭포를 볼 수 없을 거라고 말했다. 몇 해 전 물줄기가 시름시름 새기 시작해서 이제는 마른 절벽밖에는 남지 않게 되었다는 것이다.

물이 숨어버렸다니!  나는 오히려 그 소리도 형체도 보이지 않게 된 폭포를 보겠다는 일념으로 지친 걸음을 재촉해 올라갔다. 얼마쯤 올라갔을까. 물이 거의 마르다시피 한 계곡에 홀연히 서있는 절벽을 보았다. 절벽에는 아직 풀포기들이 드문드문 자라고 있었다. 풀포기들은 마치 절벽 속으로 사라진 물줄기를 따라 들어간 푸른 발자국들처럼 보였다. 물소리는 들리지 않았지만, 나는 오래도록 그 절벽 앞에 앉아 물소리를 들었다. 더 어두운 곳에 닿아 측량할 수 없는 높이로 곤두서 있는 물소리를. 더 깊이 울게 된 물소리를.

시가 슬픔을 표현하는 방식이란 그 마른 폭포와 같은 것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그러면서 정지용의 시론을 곱씹곤 한다. “안으로 열(熱)하고 겉으로 서늘옵기란 일종의 생리를 압복시키는 노릇이기에 심히 어렵다. 그러나 시의 위의(威儀)는 겉으로 서늘옵기를 바라서 마지 않는다.”

이 말처럼, 눈물을 다스리는 힘이 없이는 슬픔을 제대로 노래하기는 어려운 일이다. 울음을 터뜨리려는 힘과 울지 않으려는 힘의 팽팽한 긴장. 겉으로는 서늘한 듯하면서 안으로는 뜨거운 슬픔의 샘에서 길어 올려진 진폭과 파동을 지닌 언어. 시의 위의란 바로 그런 내면의 싸움을 통과한 언어에 의해 얻어질 수 있는 것이리라.

여기에 비추어 볼 때 그 동안 내가 써온 시가 얼마나 진정성을 지닐 수 있을까 자문해본다. 뒤돌아보면 수많은 슬픔의 물줄기가 실핏줄처럼 뻗은 채 도란거리고 있다. 저 젖은 길들을 과연 내 발로 걸어오기는 온 것인가 싶기도 하다. 바라건대, 저 실핏줄들이 모여 언젠가는 슬픔의 강물 하나 만들어낼 수 있기를. 넓게 흐를수록 더 깊이 숨어서 우는 건천이 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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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시리

June 07, 2007
*.231.234.104

시인의 이 글이 저의 뚜껑 덮힌 마른 개울을 인식하게 해주었습니다..
속에서 말라가는 감정. 생각들. 느낌들.
표현할 줄 모르고, 자꾸만 엉켜가는 그 말들, 울고 싶어도 울음이 깊은 수맥처럼 숨어들어서
뽐뿌질 되어지지 않는 그 황망한 갈증을 공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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