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 Apr, 2003

영화 '오아시스'를 보고 (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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쌀쌀한 겨울이다. 추위의 기승속에 사람들은 다가오는 새해를 이야기하고, 희망을 노래한다. 그렇게 봄이 오면 모든게 잘될 것처럼 그려내곤 하면서 즐거운 삶을 꿈꾼다. 그런 그도 겸손함은 배웠는지, 가끔은 함께 살고 있으면서 삶의 뒤안길에서 힘들어하는 고통, 불우이웃이나 장애인을 생각하기도 한다( 여기서는 장애인에 대해서만 언급하고자 한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단체나 집단, 혹은 홀로 그들에게 도움의 손길을 주는 것이, 나보다 못한 인간이라는 비아냥 섞인 동정심이 아주 배제된 것이라고 단정 지을 수는 없다. '그들은 함께 살아가지만 정상인이 아니다.' 라는 주장보다 '그들은 동등하게 함께 살아가는 인격체이다.' 라는 말이 강조되고 있는 것을 보면 우리 사회의 배경에는 전자의 향기가 짙게 배어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뭔가 제대로 생각이 박혀 있는 인간으로, 가치관이 확립되어 있어 보이려는 대학 강의실이나 기타 토론장에서는 전자가 잘못된 것이고, 후자가 사회적 분위기이지 않은게 개탄을 금치 못한다고 주장하면서도, 그 곳을 빠져 나와서 마주치게 되는 장애인에게는 혐오를 느끼거나, 그렇게까지 잔인하지 않지만 시선의 갈피를 바로잡지 못하는 경우를 자주 경험하게 된다.

그런 장애인을 이 영화에서는 주인공으로 내세웠다. 그리고 장애인을 도와 세상에 전하고 싶은 메시지를 강렬하게 표현하는 전과자가 등장한다. 전과자는 얼마전 인기리에 방영된 드라마에서도 주인공으로 등장했던 적이 있다. 일상의 사람들이 전과자 보다도 못한 삶을 살고 있다는 메시지를 냉정하게 제시하는데, 많은 사람들의 입속에 감탄을 자아내는 아름다운 여성이, 그것도 두 명씩이나 좋아해주는 비현실적인 전과자라는데 실망했던 적이 있다. 이에 비해 '오아시스'의 전과자는 주변의 시선이나 대우를 볼 때 좀 더 현실적인 것 같다. 그 곳이 어디에 있는지 몰라도 죄가 인정되면 타의적으로 옮겨지는 교도소를 향하는 길에 형보다 교도소 가는 길을 더 잘 안다는 (어쩌면 해학적 요소만 담았을지도 모르지만) 이유가 종두를 그 길 앞에 내세우는 것이 더 낳은 방법이었다고 인정하는 시선은, 세상에 함께 존재하지만 세상에서 배제된 사막에 그를 내몰았다.

한편 중증뇌성마비 장애인인 공주는 종두네 형의 뺑소니로 사망한 환경미화원의 딸로, 오빠 내외와 함께 생활을 하다가, 자신 앞으로 배정된 장애인 아파트로 떠나는 오빠 내외에 의해 사막에 버려지게 된다. 이런 공주와 종두는 자신들의 1촌과 2촌의 사건 덕택에 만나는 기회를 갖게 되고, 그들로부터의 소외된 입지가 둘의 관계를 더욱 돈독하게 하는 것 같다.

세상을 경험해보지 못한 지체 부자유로운 여성과 몸은 성하지만 꿈도 미래도 없이 그저 마음 바라는 대로 생활해와서 사회 부적응자로 낙인찍힌 남성의 만남. 처음 만남에서 서로가 사막을 딛고 살아온 발바닥을 마주치는 장면은 정말 인상적으로 남는다. 장애인의 집안을 맘대로 휘젓고 다니고, 합의되지 않은 겁탈의 의지를 보이는 그의 행동이 처음엔 이해가 되지 않았는데, 어쩌면 좀더 현실적인 시각을 유지하려는 의도가 돋보이지 않나 하는 생각으로 귀결하고 말았다.

그런 두 사람의 만남은 어쩌면 자신의 내면이 갈구하던 바로 그 오아시스를 발견한 감동이 아니었을까? 사막 한 가운데서 자신에게 삶과 생명과 기쁨을 줄 그런 존재... 서로는 자신을 사막이라 느끼며 상대방에게서 다른 사람들과 세상이 주지 못한 오아시스를 발견하려 노력한다.

하지만, 그들은 서로를 더욱 필요로 하게 되고, 그 필요는 다시 한번 사막이란 틀을 벗어나 세상으로 편입하고자 하는 몸부림(종두가 공주를 가족 회식에 데리고 간 장면)으로 이어진다. 하지만, 세상은 결코 사막을 원하지 않았다. 그 사막이 바로 자신들의 한 일부분임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그 황량함 때문에 받아들여지지 않은 것이다. 하지만, 종두의 마지막 행동은 영화의 제목인 '오아시스'의 개념을 부활시킨다. 유치장을 뛰쳐나가 그가 한 행동은 공주의 오아시스를 방훼하던 나무를 절단하는 것이었다. 깊은 밤 달빛 때문에 비쳐지는 오아시스 그림 위의 나무 그림자가 무섭노라고 말한 공주를 생각하며 그는 자르고 또 자른다. 그것은 세상을 향한 두 사람의 몸부림이다. 라디오에서 터져 나오는 즐거운 비명, 주위의 시선에는 아랑곳하지 않는 거친 동작. 사람들은 그들을 비웃고 괄시하지만, 그들에게 이제 더 이상 세상은 없다. 오직 오아시스만 남아 있을 뿐이다.

영화의 마지막 부분, 공주가 집안을 청소하는 가운데, 종두가 교도소에서 들려주는 편지의 내용은 바로 그것을 증명한다. 그들은 서로가 세상에서 소외된 사막이라 느꼈지만, 오히려 서로에게는 오아시스였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영화 속, 종두와 공주의 극중 중심인물. 하지만 그들은 실재로 현실에선 우리의 주변에서 관심을 끌지 못하는 주변인일 뿐이다. 힘없고 나약한 그들에 비해 그들 주변에 존재하는 형, 동생, 오빠들이야 말로 현실에서 툭 튀어나온 현실적인, 전형적인 인물들이다.

그런데 영화를 보다 보면 우리는 현실적인 그들이 참 너무하단 생각을 하게 된다. 자신부터도 그렇게 하고 있으면서도, 그런 세상의 시선속에 자신이 완전 배제된 상태가 아닌데도 그런 생각이 드는 것은 아마도 자신이 거기에 보여지고 있는 것은 아니니, 가족중에 장애인이 없는 제 삼자의 입장에서 객관적인 평가할 수 있을 것이라는 착각에 쌓여 있어서인지 모른다.

하지만 김기덕 감독을 제외한 대부분의 영화가 그렇듯 그들을 무조건적인 벼랑으로 내몰지는 않는다. 종두 동생의 모습은 비정한 인간 군상 사이에 어느 정도 협상이 이루어진다면 사회속에 종두와 같은 인물을 합류시키려 노력하는 인간다운 면을 가진 현실적인 인물을 배치함으로 세상은 살만하다고 얘기한다. 비정하지만 정을 느끼며 살아갈 수 있는 삶의 희망을, 가족의 정을 느낄 수 있다.

정말 나쁜 사람들이다. 하지만 그들의 모습은 바로 우리 이웃의 모습이고 우리 친척들의 모습이고 바로 우리 자신의 모습이다. 그런 우리들의 자화상을 그대로 보여주며 감독은 우리에게 반성을 하라고 채찍질을 하는 것 같다. 그러지 말라고 나무라는 것 같다.

공주의 허름한 아파트 벽에 걸려있는 오아시스 그림으로 표현되는 ‘오아시스’는 그들만의 공간, 현실 속이건 상상 속이건, 을 의미한다. 평범한 사람들은 이해하지 못하고 알면 오히려 오해하는 그들의 사랑이기에 그들은 세상과 오아시스 같은 그들만의 공간이 필요했다. 현실 속 ‘오아시스’ 가 공주의 방이라면 환상 속 ‘오아시스’는 공주가 정상인처럼 종두와 장난도하고 데이트도 할 수 있는 그녀의 상상 속 공간이라고 할 수 있겠다. 허름한 아파트 한 켠에 위치한 그녀의 방은 ‘오아시스’라고 써 있는 촌스러운 그림만큼이나 초라하고 남루하다. 외적으로 보여지는 그들의 공간은 초라한 그림처럼 이상하고 볼품이 없지만 역설 적으로 그들의 사랑을 완성하는 그 공간은 공주와 종두에겐 성스러운 공간이다. 그들의 사랑이 이해가 되고, 용납이 되는 가장 아름다운 공간이다. 공주는 정상인이 아니기에 그네들이 사랑하는 모습은 그녀의 상상 속에서만 존재한다. 또한 감독은 그들의 사랑을 좀더 일상적이고 평범하게 보여주고 싶었던 것 같다. 외적으로 보여지는 모습이 남들과는 조금 다르지만 그들 역시 남들과 다르지 않은 평범한 사람이라는 사실을 관객에게 인지시키고 싶었던 것 같다. 따라서 그들의 사랑하는 모습을 관객에게 보여주기 위해서 감독은 약간의 환타지를 빌린다. 그 환타지라는 것이 요란한 것이 아닌 공주가 정상인처럼 말하고 행동하는 자연스러운 환상공간을 만들어 그들의 사랑을 완성시킨다. 그리고 그들은 그곳에서 한없이 행복해 보였다. 사막의 오아시스처럼 세상과는 철저히 고립된 공간이어서 더 행복해 보였다.

사건은 영화의 마지막, 그들이 육체적인 결합을 이룸으로 사랑을 완성하려는 과정에서 일어난다. 순결하고 순수한 사랑을 하는 그들이 그들의 사랑을 완성하려는 순간, 그들이 보여주는 겉모습만으로 상황을 판단하는 때묻은 세상의 사람들은 그들의 그런 행동에 일방적인 오해를 한다. 멀쩡한 종두가 힘없는 공주를 가해하려 하는 것으로 . (이건 이미 종두가 처음 저질렀던 일이고 공주는 이것을 이미 용서 했는데도 말이다.)

그들은 전후 좌우를 판단하지 않고 단지 그들이 잠시 본 이상한 상황만으로 전체를 판단해 하늘이 무너진 듯 공주로부터 종두를 떼어 버리고 상황을 비약한다. 정작 공주에게 필요했고 도움을 준 사람은 종두였는데, 그들은 안그래도 외로운 공주를 버리고 떠나버린 남 같은 이름뿐인 가족인데도 말이다.

그리고 그들은 늘 그랬듯 공주의 말은 귀 기울이지 않는다. 이해하려고 하지도 않는다. 상황을 해결하려 한다는 것이 금전적인 합의를 운운해서 또 그녀를 이용하려 하는 것이 고작이다. 그들이 그녀를 짊처럼 생각했던 것처럼 그 순간 그녀는 그녀의 가족을 짊처럼 느꼈으리라 존재는 있지만 필요할 땐 누가되는 귀찮은 짊.

종두는 자신의 가족의 오해에도 공주의 가족의 멸시에도 조용하다. 그들의 결합은 신성하였지만 어찌되었던 전과 3범에 폭행 전과가 있는 그의 말은 아무도 믿지 않을 것은 자명하기 때문에 . 아무 말없이 모든 오해를 감수하는 종두의 모습이 답답하고 무고한 종두를 대변해 주지 못하는 공주의 모습이 안쓰럽다.

하지만 영화는 이런 절망적인 상황에 그들만의 방식인 희망을 심어준다. 위에서도 언급한바 있지만, 공주가 무서워하는 나뭇가지 그림자를 없애기 위해 구치소를 탈출해서 미친 사람처럼 나뭇가지를 자르는 종두와 그런 그의 행동에 대한 화답으로 그녀의 분신과도 같은 라디오방송으로 대답하는 그들만의 소통 방식은 안쓰럽지만, 후련하다. 적어도 그들은 서로의 마음을 확인하고, 이해하고 헤어지므로, 타의에 의해 몸은 떨어져 있기는 하지만 그들은 ‘편지’라는 오아시스로 다시 소통할 수 있고 사랑을 키워 갈 수 있다는 희망이 있으므로 .

그렇다 이 영화 속 종두와 공주에겐 희망이 보인다. 그들이 처해진 상황이 그들을 오해의 눈으로 바라보는 시선이 그다지 곱지 않기에 그런 그들이 안타까운데도 그들은 행복하다. 자신을 이해하는 한 사람과 소통할 수 있고 의지할 수 있기에 그들은 행복하다.

냉정하게 세상을 바라보던 영화의 냉소적 시선은 여전하지만 사랑하는 이들의 모습을 그리는 그의 손길엔 따뜻함이 담긴 듯 보인다. 세상사람들에게 욕심을 버리라고, 편견을 버리라고 말하는 듯한 이 작품에서 왠지 모를 따뜻함이 배어나온다. 모든 행복은 마음에 있으니 마음을 편하게 가지라고 조용히 훈계하고 있는 듯하다.

'아무것도 가지지 않은 세상의 따가운 시선만을 가진 종두와 공주이지만 그들 그대로의 모습으로 충분히 만족하고 사랑하는 모습이 얼마나 행복해 보이느냐 말이다.' 라고 보여주고 있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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