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름이 머무는 곳으로의 발걸음
낮에는 수업으로 밤에는 레포트로 이래저래 하루종일 계절학기 두 과목에 시달리며 무료해진 일상에 젖어있는 내가 신선함을 안겨줄 새로운 곳을 마다하고 세 차례이나 다녀왔던 운주사를 기행지로 택하게 된 연유에는 추억을 되찾고 싶은 욕망이 큰 몫을 해냈으리라 생각된다.
마지막으로 그 곳에 다녀왔던 때는 1999년 친구들보다 늦은 군입대를 앞둔 시점이었다. 여자친구와의 동행길이었고 비까지 추적추적 내리던 날이었다. 호수가 가까이에 있어 안개가 자주 끼는 지형이라 습함에 친숙해서인지, 아니면 타 불탑과 다른 석질의 것이어서인지 몰라도 비에 젖은 이 곳의 석탑과 석불은 유난히 윤기 있어 보였다.
추적스런 빗줄기에도 절터나 산길 이곳저곳을 둘러보기 어렵지 않을만큼 알맞게 질퍽스런 땅이 좋았고, 어느 곳에 있어도 볼 수 있는 (절터를 중심으로 넓게 산재해 있는) 석불과 석탑이 나에게 포만감을 안겨 주었다. 4년전 그녀와 내가 그랬던 것처럼 그때의 나와 오늘 나는 동행길에 올랐다.
장난삼아 창문을 몇 번이고 두드려봐도 아무런 대답 없던 매표소에는 방금전 누군가 몰래 들어가려다가 자신에게 걸렸던 사람이 있어 몹시 기분이 나빠 있노라고 말하고 싶어하는 표정의 남자가 날카로운 눈으로 쳐다보고 있었다. 버스에서 내리자마자 다시 한번 이 창문을 두드려보고 싶은 마음에 들떠 있던 흥분이 차갑게 식어버리는 순간이었다.
지금이라도 예전처럼 그녀가 옆에 있었다면 이 매표소는 비어 있고, 내가 다시한번 이 창문을 맘껏 두드리며
‘연인 두 명이요.’ 하면, 창문 안쪽에서 ‘잘 어울리시네요, 여자 분이 예뻐서 그냥 들여보내 드릴께요.’ 라고 말했다고 장난을 칠 수도 있을 것 같았다.
저 멀리 석탑과 석불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뉘엇뉘엇 해질 무렵의 명암이 얕게나마 내려 앉아버린 절터로 향했다. 이렇게 늦은 시간에서야 이 곳을 찾게 된 이유는 이런 적막감을 즐겨서라기 보다는 지푸라기 만큼일지라도 나와 이곳의 기분이 공감대로 연결되었으면 해서였다.
이 기분의 내가 만일 화창한 날에 이곳을 찾았다면, 그것은 마치 녹색 메뚜기가 황토 위를 뛰어 다니는 것처럼 위험한 일이었을지 모른다. 적막과 안정이라는, 녹색 메뚜기와 나의 색깔이 주는 느낌에서 적절치 못한 비유일지 모르나, 초록빛 풀밭을 뛰어 다니는 녹색 메뚜기처럼 적막한 산사의 절터에서 나의 발걸음은 가벼웠다.
마당에 드러섰다. 여러 석탑과 산자락에 자리한 석불을 손 끝으로 휘휘 가리키며, ‘누가, 언제, 왜?’ 만들었는지 명확히 밝혀지지는 않았지만, 도선국사께서 우리나라가 풍수지리적으로 동쪽으로 기우는 형상 때문에 비보풍수로 (그때는 그것이 비보풍수인지 알지 못했지만) 이곳에 천불천탑을 세웠다는 이야기, 뒤돌아 9층 석탑을 가리키며 우리나라가 배의 형태로 저 탑이 돛대에 해당한다는 설명과 「소설 토정비결」에서는 황진이의 미모에 무너졌다는 지족선사를 천불천탑을 깎고 있는 도인으로 묘사하기도 했다는 이야기를 하며, 너의 미모 때문에 오늘부터 나도 이곳에서 못다한 천불천탑을 이룩하겠노라고 말했다.
그때 이 강의를 먼저 들었거나, 인간의 사랑이 한번 이루어지면 그 마음이 절대 변하지 않는 것이었다면 황석영의 「장길산」이라는 작품에서 관군에 참패한 길산이 능주로 숨어든 것처럼 암시적으로 유도하여 소설 뒷부분에 운주사를 삽입해 놓고 있는데, 너도 느꼈다시피 이곳은 은둔을 보장해 줄만큼 깊은 산자락이 아니라는 점과 1989년에는 우리 학교 박물관에서 시행한 ‘운주사 종합학술조사’ 때, 내가 수업 받았던 교수님께서 찾아낸 새로운 문헌 기록에 의하면, 일찍이 은진미륵을 세웠던 ‘혜명’이라는 승려에 의해 조성되었다고 전하기도 한다고 덧붙여 말해 줄수도 있었을 것이다.
대웅전 앞에 다다랐다. 네 번이나 왔으면서도 이 곳 대웅전의 불상을 본적은 없었던 것 같다. 아마 우리나라 수많은 사찰 중에서 운주사의 대웅전 불상처럼 관광객의 시선을 끌지 못하는 불상은 없을 성 싶다. 칠성탱화를 잠시 관람하러 들렀을 뿐, 나조차도 벌써 와불이 있는 대웅전 왼편의 산능성을 오르고 있었으니 말이다.
마당바위에 올랐다. 운주사의 변화는 매표소 직원이 생겼다는 것만은 아니었다. 새로 깎은 듯한 표지판이 또 하나의 변화라 하겠다. 내가 군대 갔다온 동안 지금 매표소에 앉아 있는 직원이 표지판을 새로 정비하고 비어 있는 그 자리를 꿰차고 앉아 있는 건 아닐까하는 의구심이 생겼다. 그의 표정이 영 맘에 들지 않았나보다.
레포트를 위한 기행이 아니었다면 나는 아무런 사전 조사도 없이 이 곳에 왔을 것이다. 그저 느끼기 위한 것. 평소 나의 기행이란 늘 그런 것이었으니 말이다. 그랬다면 7층과 5층의 자매석탑이 있는 이 마당바위에서 지나쳤을 것이 있다. 마당바위 아래쪽으로 살금살금 발걸음을 옮겼다. 밑부분에 다다라서 조심히 바위 끝자락에 배를 깔고 누웠다. 바위 밑에 있다던 할아버지, 할머니, 큰아들 내외, 손자손녀의 석탑이 있다는 대가족군상을 보기 위해서 였다. 혹시라도 뒤에서 밀어버릴지 모른다는 두려움에 바위 끝부분에 힘있게 지탱해 놓은 두 팔 때문인지 그들의 모습이 잘 보이지는 않았지만, 나는 고개를 돌리고 여기에 석불들이 많이 보인다고 장난스런 손짓을 해보였다.
칠성바위와 와불의 갈림길 앞에 와불에서 떼어냈다던 머슴부처가 있었다. 침 한번 삼키고 목에 힘을 주어 ‘이리오너라~’를 외치고 와불이 있는 머슴부처 쪽으로 올랐다. 100년, 200년, 500년 전에도 그러했겠지만 와불은 4년전 그대로였다. 와불의 머리맡에 불공드리기 위한 직사각형 비닐하우스 이외에 변한 건 아무 것도 없었다. 그 누구도 이 와불을 향해 ‘初心으로 돌아가라.’며 말하는 것은 없을 듯 싶었다.
석양이 지기 직전인데도 운주사 천불천탑의 마지막 염원이요, 가장 큰 부처님을 모시기 위한 것이었다는, 운주사에서 민간인에게 가장 큰 신비로움을 주는 곳이어서 인지, 이 곳 와불에는 몇몇 사람들이 보였다.
본래 와불은 열반에 드신 누워 있는 부처 상을 말하는데, 이 곳의 와불은 열반 상을 조각한 것이 아니라 조각이 완료되면 일으켜 세우려 했는데 암반 특성상 미션을 완성하지 못했다고 한다. 이 와불이 일어나면 새 세상이 도래할 것이라는 전설을 생각하며 가부좌한 와불 옆에 누워 사진을 찍으며 잠시 그를 부러워했다.
옷을 털고 일어나 북두칠성 별자리와 유사하다는 칠성바위를 향했다. 북두칠성의 천문학적 좌표대로 놓여 있고, 별의 밝기에 따라 다르게 잘 다듬어진 원판형 큰 돌의 크기를 비교해보며 돌아가면 제일 먼저 밤하늘을 보고 확인해 봐야겠다 생각했다.
돌아서면 아쉬운 게 가끔 있다. 돌아나오려는 발걸음을 뒤로하고 칠성바위 중 가장 작은 바위를 골라 밀어보기로 했다. 꿈적도 하지 않았지만 두 팔을 모두 바위 미는데 힘쓰고 있던 나는 그녀에게 함께 밀어보자고 고개를 돌리며 턱짓 했다.
다시 대웅전을 향해 내려가는데, 북쪽에 있는 큰 바위 위에 사람인 듯하기도 하고 불상 같기도 한 것이 석양에 반사되어 빛나고 있었다. 대웅전 뒤쪽으로는 원형구형탑 까지만 가본 내게 이번에는 꼭 그곳에 들러주라고 부르는 불빛 같았다.
대웅전에 와서야 그곳이 공사바위라는 것을 알수 있었다. 원형구형탑을 지나 4층석탑, 명당탑, 마애여래좌상을 지나치니 공사바위가 보였다. 이 곳에 도착해 뒤로 돌아보니 서편 석양이 나에게 정기를 불어넣어주는 것처럼 아름다운 경관이었다.
운주사의 천불천탑이 조성될 당시 이 대공사를 담당했던 감독관이 총지휘를 했던 곳으로 전해오고 있다는데, 이를 증명이라도 하듯이 바위에는 커다란 홈이 패어 있었다. 정말로 감독관이 앉아 지휘할려고 홈을 팠는지, 이 곳에 오르는 길에 마주친 스님의 선사의 아주 오래된 선사께서 하루하루 반복되는 일출과 석양이 질 무렵 이 명당에서 수행을 위해 깎아놓은 것인지 알 수 없으나, 누구든 일출과 석양을 이 곳에서 맞이한다면 세상을 다 가진 듯한 느낌을 받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 곳에서 보면 어지럽게 흩어져 있는 것처럼 보이던 탑과 불상이 잘 정리되어 세워져 있음을 알수 있다고 뒤 따라 오던 아저씨가 말을 걸었다. 계곡 한가운데로 선을 그어 오듯이 우뚝우뚝 탑들이 솟아 있고 계곡 양편의 바위절벽을 따라서 불상들이 한 무더기씩 떼를 지어 모여 있고, 계곡을 굽어보듯이 산등성이에도 탑과 불상이 서 있고, 오른편 널찍한 봉우리에는 와불이 있다고.
대충 그런 것 같다고 대답하며 지는 석양에 눈이 팔려 있을 때, 중학교 선생님 생각이 났다. 선생님께선 화순에 있는 운주사에 가게 되면 산길로만 다니지 말라고 말씀하셨다. 지금은 많이 사라졌지만, 자신이 그곳에 갔을때는 입구에 들어서서 절터고 산이고 할 것 없이 발 내딛는 곳마다 석불이요, 석탑이었다고 하셨다.
어둠이 제법 짙게 깔리고 있었다. 산을 내려와 마당을 걸어나오며 나의 시선을 어둠의 연장선상에 놓고 다시금 돌부처와 돌탑을 둘러보았다. 정말 못생겼지 싶었다. 하나하나 뜯어봐도 한결같이 못생겨서, 어쩌면 아름다움이 인간의 절대적 가치가 되는 사회에 살고 있는 나의 눈으로는 부처의 위엄이라고는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이 곳의 석불상이 일반적 정통불상이 지닌 도상에서 크게 벗어난 파격적인 형식미를 지닌다면 석탑은 자연석 기단과 특이한 장식 무늬, 원반형이나 오가리 같은 옥개석을 가진 석탑은 물론 판석을 다듬지 않고 그대로 얹어 쌓은 돌탑의 형태로 제작자의 개성이 느껴진다.
이처럼 정형이 깨진 파격미, 힘이 실린 도전적 단순미, 친근하면서도 우습게만 느껴지는 토속적인 해학미와 아울러 그것들이 흩어져 있으면서도 집단적으로 배치된 점이 운주사의 신선한 감명이며 특별한 매력인 것 같다.
입구로 빠져 나오는 길에 좁고 얕은 개울을 연결해놓은 돌다리를 보니, 언젠가 비속에서 견우와 직녀가 만나듯 장난끼를 피웠던 웃음소리가 들리듯 했다. 이 곳이 영원한 고향이지 싶었다. 그건 손잡고 동행했던 추억 때문만은 아니었다. 아들을 얻기 위해 이 곳에 와서 돌부처의 코를 떼어가 갈아 먹어야 했던 여인에게 그러했듯, 광주항쟁 이후 피비린내 나는 학살의 기억에 허덕이던 이들의 가슴에게 그러했듯, 그렇게 우리들이 잊고지내던 꿈과 좌절된 역사의 상처를 달래는 고향처럼, 운주사를 빠져나오는 내 발걸음에는 이곳의 석불석탑처럼 소박한 미소가 묻어났다.
어제 컴퓨터 메신져(Messenger) 대화명에 ‘한시라도 욕을 지껄이지 않으면 살수 없는 열여덟 세상아~’ 라고 적혀있던 친구에게 이곳에 꼭 한번 와보라고 당부하고 싶다. 어느 시구절에 있다는 ‘위로받고 싶은 사람에게 위로받는 사람은 행복하다.’라는 말도 그가 이곳에 와 본다면 더 이상 나에게 하지 않을성 싶다.
'누가? 언제? 왜?‘ 지었는지 명확히 밝혀지지 않은 이 곳을 떠나며, 나는 ’어디서? 무엇을? 어떻게?‘ 해 나가야 하는지‧‧‧‧‧.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