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 Jun, 2005

만남과 이별

머시라고 조회 수 4302 추천 수 0 목록
밤이 시작된 후 견뎌왔던 시간보다
아침을 기다리는 것이 가까운 어둠
그리고 봄이었다.

고요한 기숙사 벤치에
나름대로 값비싼 술상을 차렸다.
쏟아지는 절망감에 흠뻑 젖어서
따뜻한 격려와 위로가 갈마들 만한 날
예상을 뒤엎고 불어닥친 침묵기류,
그 냉랭함에 덜덜거렸던 나만을 위한 술상.

몇 잔이나 들이켰을까.
어둠 속에서 누군가 걸어온다.
다가오더니 술상 저편에서 걸음을 멈춘다.
그리고 나를 쳐다본다.
꼴아 보는 내 눈은 해롱대는데
그 눈에선 빛이 난다.
반딧불이의 그것보다 신비한 광채.
교내에 4군데의 서식지를 가진
이웃의 토토로 짝퉁
너구리였다.

공포가 밀려왔다.
한달 전쯤,
학교 커뮤니티와 기숙사 게시판의 너구리를 봤다던 글에
광견병 옮기니 조심하라고 썼던 댓글에
이 너구리가 항의 겸 복수하러 온 것은 아닐까,, 하며..

엉겁결에 안주 하나 던져줬다.
나는 겁을 먹었고
그는 안주를 먹었다.
다 먹어갈 때쯤 또 하나.

다 먹고 날 보는 눈빛과 표정에서
그 댓글을 읽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쓴 사람이 나인지는 모르는 게 확실했다.
다행이다..

다 먹었길래
안주 하나를 더 줬다.
하나 더..
하나 더..
하나 더..

시간이 좀 더 흐른 뒤
안주를 던지며
시작된 걱정..

너구리가 이 안주에 질리면
이별할 준비를 마치기 전에
떠나가 버릴지 모른다는
쓰잘데기 없는 걱정

너구리는 떠났고,
그 자리에 찾아 든 고양이.
고양이한테 잘못했던 일은 없나?
에이~ 모르겠다.
안주 주께, 먹고 얘기하자. ^ㅁ^

다 먹고 쳐다본다.
나는 너구리보다 더 터울을 두며
안주를 건넸다.
질리지 말길.

1
profile

ansh

August 05, 2005
*.131.129.24

이 아프다고 구랬는데..미안허요..
List of Articles
번호
146 [늑대가 산다-3] 숲 속 미니홈피 차단사건 [1] 머시라고 2008-06-26 11971
145 하루하루 참아내는 나날 [1] 머시라고 2008-05-11 11740
144 10년만 더 사라고 한다면? 머시라고 2008-03-03 15028
143 고맙습니다. [1] 머시라고 2008-02-10 6091
142 결혼식 비디오 [6] 머시라고 2007-12-19 6945
141 혼인신고를 미루고 있다. file [1] 머시라고 2007-12-16 14448
140 [늑대가 산다-2] 늑대 씨~ 머시라고 2007-11-30 4402
139 [늑대가 산다-1] 늑대는 머시라고 2007-11-28 3935
138 라디오 내 목소리 머시라고 2007-11-04 4144
137 역할 머시라고 2007-09-05 4588
136 비러민 머시라고 2007-08-18 11780
135 부러움 [1] 머시라고 2007-08-01 11400
134 오손도손 머시라고 2007-06-10 12648
133 새에게도 귀는 있다. 머시라고 2007-02-06 23845
132 뽀다구나는 자리 머시라고 2007-02-05 3921
131 이면지 머시라고 2006-12-16 4442
130 나의 첫 공모 [1] 머시라고 2006-08-17 4817
129 오~ 필승 코리아~! [2] 머시라고 2006-06-13 6428
128 당신이라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2] 머시라고 2006-05-24 3851
127 항상 감사하며 친절히 모시겠습니다. 머시라고 2006-04-13 3642
외롭지 않으면 길을 떠나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