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 Dec, 2006

이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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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제 : 오해가 냇물에 빠진 날

 초등학교 근처 문방구 밖. 하굣길에 한 꼬마가 유리문 앞에 쪼그려 앉아 안쪽을 들여다본다. 갈망하는 눈빛은 색연필 세트에 고정된다. 800원만 더 모으면 꼬마도 가질 수 있다. 일어나는데 가게 문지방 넘어 안방에 앉아 있는 같은 반 친구가 보인다. 부럽다.

 쌀 공판이 있는 날, 농촌의 꼬마 집 아침 풍경. 어머니는 부엌에서 식사를 준비하고, 아버지는 공판장에 쌀을 실어 나르기 위해 마당에서 트랙터에 수레를 달고 있다. 손이 부족한지 아버지는 ‘아직 멀었냐?’며 꼬마를 부른다. 부모님 방에서 이불을 개고 있던 꼬마는 황급히 대답한다. 이불을 장롱에 던져 올린 꼬마는 재빨리 방바닥에 떨어져 있는 동전들 중 100원을 쥐어 바지주머니에 담고 마당으로 뛰쳐나간다. 700원 남았다.

 다음 날 아침 꼬마 집 마당. 아버지는 트랙터에서 수레를 떼어내고 쟁기를 달고 있다. 이불을 갠 부모님 방의 바닥에 오늘은 동전이 없다. 벽에 걸린 아버지 바지 뒷주머니가 두툼해 보인다. 만져본다. 쌀 공판 대금인 것 같은 지폐 뭉치 아래 동전들이 잡힌다. 손을 뻗으니 손가락 끝이 바지 뒷주머니 입구에 닿을 정도다. 발뒤꿈치를 들어보지만 지폐만 간신히 만져질 정도다. 안간힘을 쓰다가 지폐 한 장의 끝단을 잡고 빼냈다. 만 원짜리다.

 하굣길 산자락 모퉁이. 꼬마가 돌덩이를 들자 열 몇 개 정도의 동전이 모아져 있다. 주머니에는 색연필 세트를 사고 남은 돈이 있다. 모퉁이 너머에서 경운기 오는 소리가 들린다. 꼬마는 황급히 비닐봉지에 있는 색연필 세트를 가방에 넣고, 지폐를 비닐봉지에 담아 돌덩이로 눌러 가려놓고 집으로 향한다. 다리를 지나는데 냇가에서 물장구치는 마을 아이들이 보인다. ‘액운이 껴서 물가에 가면 안 된다.’는 어머니 당부에 꼬마는 수영 한번 못 해봤다.

 집에 들어가려는데 분위기가 으스스했다. 마당을 들어서니 마루에 앉아있는 화난 모습의 아버지가 보였다. 아버지가 꼬마에게 다가간다. 꼬마의 가방을 벗겨내 안을 살피다가 색연필 세트를 집어낸다. 나머지 돈의 행방을 묻는다. 산자락 모퉁이에 도착한 아버지가 돌덩이를 치운다. 지폐가 든 봉지와 동전을 가지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아버지는 아무 말씀도 하지 않는다. 집에 도착한 아버지는 방으로 들어가서 문방구로 전화를 한다. 꼬마 애가 큰돈으로 뭔가를 사는데 의심 한번 안 해봤냐며 주인을 다그쳤다.

 다음 날 아침 교실을 들어서는데 어제 꼬마 집을 방문했던 음산한 기운이 먼저 와 있는 듯 했다. 음산스러움의 중심에는 문방구집 아들이 있었다. 다른 아이들의 눈빛에는 기자인 그와 도둑인 꼬마가 있었다. 꼬마는 자리에 가 앉아 책상에 머리를 숙였다. 여기저기서 ‘도둑놈’ 비슷한 소리가 웅성거려졌다. 체육시간이 되어 체육복으로 갈아입고 교실을 나서는데 화장실이 급해졌다. 화장실을 나와 운동장에 나갔을 때, 반 아이들은 모두 모여 있었다.

 다음 날 종례시간, 교실에 들어서는 담임선생님의 표정이 어두웠다. 반 친구가 어제 교실에서 돈을 잃어버렸다는 것이다. 눈을 감고도 손을 든 사람이 없자, 모두를 책상위에 꿇어앉히고 두 손을 들게 했다. 힘겨운 벌에 지친 한 아이가 입을 열었다. 어제 체육시간에 꼬마가 제일 늦게 나왔다고 했다. 선생님은 꼬마의 그저께도 알게 됐다. 꼬마는 돈을 집에 두었다고 했다.

 다음 날 아침, 꼬마는 아버지의 바지를 뒤졌다. 돈이 없었다. 방 곳곳을 찾아봤지만 급한 마음에 돈은 더욱 보이지 않았다. 아침을 먹고 있는데 옆집 할머니가 전기세 영수증을 들고 오셨다. 학교 가는 길에 농협에 들러 내주라고 하셨다. 농협 앞을 서성이던 꼬마는 학교에 가서 선생님께 전기세를 냈다.

 며칠 뒤, 아버지는 밤에 꼬마를 냇가로 데리고 가서 깊숙한 곳까지 들어가게 했다. 냇물이 목에 찰 때쯤 나오게 했고 발가락이 보이면 다시 들어가게 했다. 울면 그칠 때까지 못 나오게도 했다. 세상이 몹시 흔들어대는 것처럼 꼬마는 몸을 떨었다. 구름이 달을 가렸다. 어둠 속에서 꼬마를 찾는 옆집 할머니의 목소리가 점점 크게 들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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