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 Jan, 2010

나호열 - 비가 후박나무 잎을 적실 때

보시리 조회 수 8292 추천 수 0 목록
□□□□□□□□□□□□□□□□□□□□□□□□□□□□□□□□□□□□□□

   비가 후박나무 잎을 적실 때

  비가 후박나무 앞에 잠시 머물렀다
  눈물 한 방울
  드넓은 대지를 적시지 못하지만
  보이지 않는 뿌리를 향하여 가는
  한 생애에 발걸음을 남긴다

  만리 밖에서 어느 사람이 활짝 웃을 때
  마침 봉오리를 터뜨리는 꽃을 내가 보듯이
  오늘밤 내리는 성긴 빗소리는
  또 누구의 울음이겠느냐

  열매 하나 맺힐 때마다
  하늘이 우르르 무너지고
  목숨이 다할 때마다
  별들은 맑은 종소리로 울린다

  비가 후박나무 잎을 적실 때
  나는 땅의 소리를 듣는다


□□□□□□□□□□□□□□□□□□□□□□□□□□□□□□□□□□□□□□


나의 존재감이란 참 미미합니다
어떤 사람은 그 꿈의 단위를 그 사회나 나라나 세계..에 두지만, 나라는 소시민은
후박나무 앞에 떨어지는 빗방울이 온 대지를 적시지 못하는 것처럼,
그저 한뼘 남짓한 내 하루하루의 앞가림에.. 가지고 있는 희노애락을 소진할 따름입니다.
그 한뼘이 나의 우주입니다.
열매가 하나 맺히면 이 우주가 진동을 하고, 누군가 이 한뼘 안에서 넘어지면
같이 눈물을 흘립니다.
..라고 생각해왔습니다, 그런데..

이 싱크로나이즈드된 움직임이 우주 반대쪽의 흔들림에 반응하는 것일 수도 있다는 것을
처음 깨닫습니다. 만리 밖의 어느 사람의 웃음소리와 지구 반대쪽 누군가의 마음 저밈이
나의 소우주에 꽃봉오리로 맺히고 빗물로 흐를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해보지 못했습니다..

지구, 남쪽으로 반대쪽..어느 나라의 천재지변으로 인한 그 고통이 나의 작은 우주를
자꾸 흔들고 있습니다. 고통은 그 전에도 존재했고 이 이후에도 사람이 살아가는 한은
끊임없이 찾아오련만, 왜 유독 이 아비규환의 절규가 자꾸 불편하게 만드는 것일까..

김영천이라는 시인의 '선운사 명부전'이라는 시의 후반에 이런 부분이 나옵니다.

[이름은중요한것이아니라해도이름이있기전에꽃이며나무며별들이있었다해도모두다그이름에연연합니다 명예라든지명성따위가다그렇습니다 때로는이름밝히기를거부하거나가명을쓰기도합니다만우리가어떤것들에이름을붙이기전그것들이이미존재했다고해도도대체우리는그이름을벗어나지못합니다 내가당신의이름을채알기전에도당신은누구의눈물이었습니까이제야그젖은것들을닦아내며잊혀진이름들을일일이외칠지도모릅니다 ]

이름을 부르기 전에도 존재를 했을지라도 이름이라는 굴레에 묶이는 것은 그 이름으로
누군가에게 불리우기를 갈구하는 마음 때문이 아닐까..중얼거렸더랬습니다.
어떤 의미가 있어야 한다는 말인지도 모르지요.

내가 존재하는 의미는 이것이 전부인가..
내가 이 땅위에서 할 일은 이것이 전부인가,
오늘이 내 이름이 명부冥府 에 적히기 전의 마지막 날이라 가정할 때..
누가 기쁜 기억으로, 안타까운 의미로 내 이름을 불러주게 될까.

List of Articles
번호
170 김정란 - 눈물의 방 보시리 2014-05-05 7392
169 김수영 - 슬픔이 하나 보시리 2014-04-21 6344
168 백학기 - 오랜만에 쓴 편지 file 보시리 2013-11-13 5228
167 문태준 - 思慕 file 보시리 2013-10-19 4989
166 다카무라 고타로 - 도정 file 머시라고 2013-07-17 10246
165 김재진 - 보일러 file [2] 보시리 2012-06-26 9348
164 구상 - 그 꽃 보시리 2012-01-31 4993
163 김춘수 - 西風賊 file [1] 보시리 2012-01-02 8931
162 유재두 - 풀은 풀이라고 불렀으면 file 보시리 2011-10-24 16535
161 김종삼 - 어부 [10] 보시리 2011-10-01 10128
160 천양희 - 희망이 완창이다 보시리 2011-07-07 5711
159 정현종 - 방문객 file 보시리 2011-03-04 27246
158 류시화 - 들풀 [1] 머시라고 2010-05-04 9365
157 박제영 - 거시기 보시리 2010-03-20 12084
156 서안나 - 동백아가씨 보시리 2010-03-19 22681
155 최원정 - 산수유 [2] 보시리 2010-03-13 12191
154 이문재 - 노독 보시리 2010-02-28 17516
153 이기철 - 유리(琉璃)에 묻노니 보시리 2010-02-19 6241
» 나호열 - 비가 후박나무 잎을 적실 때 보시리 2010-01-16 8292
151 박남준 - 흰나비 떼 눈부시다 보시리 2009-12-17 7413
외롭지 않으면 길을 떠나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