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 Jul, 2007

김정란 - 기억의 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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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억의 사원

        퉁, 하고 시간이 넘어졌다
        난 주의깊게 시간의 파편을 쓸어모았다
        그리고 그 위에 유리 뚜껑을 덮고
       <기억의 사원>이라는 팻말을 세웠다

        오래 기다려야지

        나는 현재에게 말했다
       "네 손을 다오."
        현재가 아주 따뜻한 손을 내밀었다

        오래 기다려야지

        난 현재의 손을 잡고
        유리 뚜껑 위에 올라선다

        사라지는 건 아무것도 없다
        과거는 절대적인 현존이다
        아무도 내게서 그걸 뺏어가지 못한다

        난 기다린다 오래 아주 오래
        과거의 시간들이 천사의 날개를 발생시켜
        스스로의 힘으로 유리뚜껑을 들어올릴 때까지
        과거의 의미가 투명하게 드러나고
        혼란을 살아내는 내 현재의 따뜻한 몸을
        사원의 현존에 차고 맑게 통합시킬 때까지

        난 섣불리 유리뚜껑을 열지 않는다

        다만 지켜볼 뿐이다
        잊지 않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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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치 않던 졸속 여행을 갔습니다.
' 내친 김에~' 라는 말대로 말이지요.
3차원에서 사는 나로서는 이해에 걸림돌이 되는, 운명이라던가, 예지라던가 하는 말처럼
무언가 의미가 있겠지 생각하면서 그냥 저지른 일입니다.

로스앤젤레스를 지나, 샌디에고까지 850 킬로를 흘러내려갔을 때,
별다방(스타벅스)에서 커피 한 잔 나눈 지기로부터 우연히 들은 이야기가 있었습니다.

Bodies,The Exhibition 이 샌디에고 주립대학 옆, Towne Center에서 열리고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짧게 들은 설명으로도 무언가, 끌리는 것이 있어서 슬렁~슬렁 찾아갔습니다.

어두운 동굴같은 전시실에 스칼렛, 붉은 조명. 거기에 그들이 있었습니다.

아시안으로 보이는 body 들이 전시되어 있는데, 호흡기계, 순환기계, 뇌신경계, 근육골격계,
피부..등의 계통별로 섬세하게 각 부위의 기능 설명과 함께 준비/보관된 전시물들은
그저 하염없이 놀라울 따름이었습니다.
그냥 주욱~ 늘어놓은 것이 아니라, 그 중 몇 가지는 자세를 잡고 서있습니다,
공을 던지는 사람, 책을 읽는 사람, 피아노를 연주하는 사람 등.
물론, 그 자세의 근골격 등,<내부>를 볼 수 있게 해주는 것입니다.. 상상 엄금 ^^

너무나 엄숙한 장면들이라서, 어떤 사람은 춤을 추고 있는 자세였는데도, 가볍게 볼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 사람들의 인간,존엄성이 헤쳐졌다는 느낌은 오지 않았습니다,
그보다는.. 허준의 스승인 유의태 선생이 떠올랐지요.

그들의 모습은 안과 밖으로 모두, 모~두 드러났지만, 오히려 볼 수 없던 부분이 있습니다.
그렇게 들여다 봐도, 또 들여다 봐도 그들의 생각과 마음은 볼 수가 없었습니다,
그들의 기억도 볼 수가 없었습니다.
그것은 설령 몸을 잃더라도 절대로 빼앗길 수 없는 것인가 봅니다. 사라지는 것은 없다..

그들의 과거들이 마음들이 천사의 날개를 발생시켜, 그들의 몸을 간직하고 있는 유리문을
열고, 아름다운 곳으로 날아올라갔기를 바래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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