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 Jun, 2007

기형도 - 바람은 그대 쪽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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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바람은 그대 쪽으로

   어둠에 가려 나는 더 이상 나뭇가지를 흔들지 못
  한다. 단 하나의 靈魂을 준비하고 발소리를 죽이며
  나는 그대 窓門으로 다가간다. 가축들의 순한 눈빛
  이 만들어내는 희미한 길 위에는 가지를 막 떠나는
  긴장한 이파리들이 공중 빈곳을 찾고 있다. 외롭다.
  그대, 내 낮은 기침 소리가 그대 短篇의 잠속에서
  끼어들 때면 창틀에 조그만 램프를 켜다오. 내 그리
  움의 거리는 너무 멀고 沈默은 언제나 이리저리 나
  를 끌고 다닌다. 그대는 아주 늦게 창문을 열어야
  한다. 불빛은 너무 약해 벌판을 잡을 수 없고, 갸우
  뚱 고개 젓는 그대 한숨 속으로 언제든 나는 들어가
  고 싶었다. 아아, 그대는 곧 입김을 불어 한 잎의
  불을 끄리라. 나는 소리 없이 가장 작은 나뭇가지를
  꺾는다. 그 나뭇가지 뒤에 몸을 숨기고 나는 내가
  끝끝내 갈 수 없는 생의 僻地를 조용히 바라본다.
  그대, 저 고단한 燈皮를 다 닦아내는 薄明의 시간,
  흐려지는 어둠 속에서 몇 개의 움직임이 그치고 지
  친 바람이 짧은 휴식을 끝마칠 때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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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세상은 온통 크레졸 냄새로 자리잡는다. 누가 떠나든 죽든
  우리는 모두가 위대한 혼자였다. 살아있으라, 누구든 살아 있으라.'
                                                         [비가 2 - '붉은 달' 중]

..이렇게 타이르던 기형도 시인은, 불과 29년이라는 길지 않은 시간을 남기고
종로의 어느 극장안에서, 새벽 3시라는 외로운 시간에 생을 마무리 했습니다.
생을 마무리하는 것이 우리의 선택 소관이 아님을 아는데도, 이상하리만치
그의 그 시간은 그가 마무리한 것 같은 강한 느낌을 줍니다.

  '그리하여 나는 우선 여기에 짧은 글을 남겨둔다
   나의 생은 미친 듯이 사랑을 찾아 헤매었으나
   단 한번도 스스로를 사랑하지 않았노라'
                                                          ['질투는 나의 힘' 중]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말.
그렇잖아도, 나를 사랑할 수 있어야 비로소 그 말의 무거운 비중을 깨닫는 것이라는
생각을 했었습니다.

기형도 시인의 시들이 흰 깃발처럼 온통 나부끼는 어지러움 속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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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롭지 않으면 길을 떠나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