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3 Mar, 2005

안도현 - 눈 그친 산길을 걸으며

머시라고 조회 수 6907 추천 수 0 목록
□□□□□□□□□□□□□□□□□□□□□□□□□□□□□□□□□□□□□□

눈 그친 산길을 걸으며

눈 그친 산길을 걸으며
나는 경배하련다

토끼가 버리고 간 토끼 발자국을
상수리나무가 손을 놓아버린 상수리 열매를
되새떼가 알알이 뿌려놓고 간 되새떼 소리를

이 길을 맨 처음 걸어갔을 인간의 이름이
나보다는 깨끗하였을 것이라 생각하고
소나무 가지 위에 떨어지지 않도록 흰 눈을 얹어두련다

산길은, 걸어갈수록 좁아지지만
또한 깊어지는 것

내가 산길을 걷는 것은
인간의 마을에서 쫓겨났기 때문이 아니라
인간의 마을로 결국은 돌아가기 위해서다

저 팽팽한 하늘이 이 산의 능선을 꿈틀거리게 하듯이
겨울바람이 내 귓볼을 빨갛게 달구어
나는 외롭지도 슬프지도 않다
나뭇잎 하나 몸에 달지 않아도 춥지가 않다

눈 그친 지구 위에
산길이 나 있다
나는 산길을 걸어가련다

                                                  - 안도현 '그리운 여우' 중에서
□□□□□□□□□□□□□□□□□□□□□□□□□□□□□□□□□□□□□□

나의 산행은 결국
인간의 마을로 돌아가기 위한 것

걸을수록 좁아지지만, 또한 깊어지는
나는 산길에 서 있다
나뭇잎 하나 몸에 달지 않고.

스펀지처럼 적극적으로 흡수하리라
모두에게 경배하는 마음으로

힘내자, 아자!

List of Articles
번호
90 황지우 - 너를 기다리는 동안 [12] 보시리 2005-04-21 23021
89 최옥 - 그대에게 닿는 법 보시리 2005-04-12 5962
88 안도현 - 겨울 강가에서 [1] 머시라고 2005-03-24 6589
87 이정하 - 그런 날이 있었습니다 [1] 머시라고 2005-03-08 7059
» 안도현 - 눈 그친 산길을 걸으며 [1] 머시라고 2005-03-03 6907
85 남유정 - 마음도 풍경이라면 보시리 2005-02-27 6246
84 도종환 - 폐허 이후 머시라고 2005-02-23 10307
83 양애경 - 버스를 타고 돌아오며 보시리 2005-02-22 6324
82 고정희 - 사랑법 첫째.. [3] 보시리 2005-02-21 6624
81 고정희 - 상한 영혼을 위하여 [3] 보시리 2005-02-19 13694
80 정호승 - 봄길 [3] 보시리 2005-02-11 9377
79 정호승 - 물 위에 쓴 시 [1] 보시리 2005-02-05 6262
78 김남조 - 빗물 같은 정을 주리라 보시리 2005-02-02 8883
77 나희덕 - 비에도 그림자가 머시라고 2005-01-31 9523
76 도종환 - 담쟁이 [3] 보시리 2005-01-30 12268
75 도종환 - 있어야 할 자리에 있는 것들은 아름답다.. [3] 보시리 2005-01-25 8813
74 나희덕 - 입김 file 머시라고 2005-01-20 6639
73 김재진 - 너를 만나고 싶다 보시리 2005-01-18 6216
72 도종환 - 꽃다지 보시리 2005-01-15 5843
71 황동규 - 미명에.. 보시리 2005-01-13 8796
외롭지 않으면 길을 떠나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