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2 Apr, 2003

원태연 - 한 여자를 사랑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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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전 홈페이지에서 가져온 내용입니다.

3년전 8월이었다. 그녀가 찾아오는 날이었다.
광주에서 강원도 삼척까지는 10시간 정도 걸린다.
새벽6시에 출발했다는 소식을 아침에 접했다.
너무 설레였다. 너무 멀리서만 그리워했기 때문이다.

쪼그려 앉아 담배라도 피울때면,
기어가는 개미를 보고도
'느려도 넌 자유로우니
그녀에게 내소식 전해주라' 말장난하고,
남쪽으로 날아가는 새라도 한 마리 보일라치면,
기뻐서 손흔들며 뒹뒹 뛰어댔다. ^^; 이론 @.@

오늘 그녀가 그먼길을 면회오는 날이다.

점심을 먹고 잠깐 쉬는데,
책 한권이 눈에 띄었다.
'사랑해요! 당신이 나를 사랑하지 않는 시간에도.....'

3시간째 책 9페이지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9페이지를 잡은 손은 수전증처럼 떨고 있었다.
내 눈이 글썽이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내용은 한 군인에 대한 것이었다.
손이 갈라지게 일하며 어렵사리 외박을 얻어냈단다
그래서 그녀가 면회를 오는 날이었단다.
둘사이에 그녀 부모님의 반대가 너무 심했다나?
위병소 면회실에서 기다리는데 너무 초조했단다.
6시에 면회실문이 닫혔습니다.
초조한 밤이었답니다.
밤9시가 넘었는데도 그녀는 오지 않았답니다.
초조하기도 하고, 우울하기도 하고, 미치는줄 알았단다.

내무반으로 돌아와 티비를 보는데,
뉴스속보가 뜨고 있었단다.
'오늘 낮 두시 동서울에서 강원도 화천으로 가던
고속버스가 언덕아래로 굴러 뒤집혔습니다.'

그리고 자막으로 사망자 명단이 나왔습니다.
제발제발하던 바램때문인지,
무슨 고시에 합격이나 한것처럼 좋은 일이라고
한동안 그녀이름이 화면에서 사라지지 않더랍니다.

그래서 지금 불안합니다.
그녀는 무사히 올수 있을까요?
도착하려면 2시간 남았는데, 눈물이 납니다.
울고싶을때는 웃음만 나오더니만...^^;

그녀를 만나면 꼬옥 껴안아 주어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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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여자를 사랑했습니다>


인간이 얼마만큼의 눈물을 흘려낼 수 있는지 알려준
한 여자를 사랑했습니다

사진을 보지 않고도 그 순간 그 표정 모두를 떠올리게 해주는
한 여자를 사랑했습니다

비오는 수요일 저녁, 비오는 수요일에는
별 추억이 없었는데도 장미 다발에 눈여겨지게 하는
한 여자를 사랑했습니다

멀쩡히 잘 살고 있던 사람 멀쩡한데도 잘 못 살게 하고 있는
한 여자를 사랑했습니다

신이 잠을 자라고 만드신 밤을 꼬박 뜬 눈으로 보내게 만드는
한 여자를 사랑했습니다

강아지도 아닌데 그 냄새 그리워 먼 산 바라보게 만드는
한 여자를 사랑했습니다

우연히 들려오는 노래갓 한 구절 때문에
중요한 약속 망쳐버리게 만드는
한 여자를 사랑했습니다

껌 종이에 쓰여진 혈액형 이성 관계까지 눈여겨지게 만드는
한 여자를 사랑했습니다

스포츠 신문 오늘의 운세에 애정운이 좋다 하면
하루종일 호출기에 신경 쓰이게 만드는
한 여자를 사랑했습니다

썩 마음에 들어오지 않았던 내 이름을 참 따뜻하게 불러주었던
한 여자를 사랑했습니다

그날 그 순간의 징크스로 사람 반병신 만들어 놓은
한 여자를 사랑했습니다


담배연기는 먹어버리는 순간 소화가 돼
아무리 태워도 배가부르지 않다는 걸 알려준
한 여자를 사랑했습니다

목선이 아름다우면 아무리 싸구려 목걸이를 걸어주어도
눈이 부시게 보인다는 걸 알려준
한 여자를 사랑했습니다


모르겠습니다, 그 여자도 나를 사랑하고 있을지는
그저 모든 이유를 떠나
내 이름 참 따뜻하게 불러주었던
한 여자만 사랑하다 가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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